영화 주인공은 흥행 부담에 시달린다. 연기만 잘 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 게 아닌 것이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한 뒤 연극배우로 12년, 그리고 영화배우로 10년째 활동중인 박희순(42)도 다르지 않다.

박희순의 요즘 출연작은 <가비>와 <간기남>(간통을 기다리는 남자)이다. <가비>(감독 장윤현)에선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 <간기남>(감독 김형준)에서는 간통사건 전문 형사 역을 맡았다. 박희순은 두 영화에 대해 “매력있는 배역으로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출연했다”고 밝혔다.

 

<가비>는 고종과 가비(커피의 영어발음을 따서 부른 고어)를 소재로 한 영화다. 고종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일본의 계략을 받아들인 ‘일리치’(주진모)와 ‘따냐’(김소연)가 벌이는  독살 계획의 표적이 된다. 매우 비중있는 배역이지만 주연이 아니었다. 장윤현 감독은 박희순에게 특별출연을 해달라고 했다. 박희순은 시나리오를 읽고 장 감독에게 정식으로 출연하겠다고 했다. “서너 번째에 이름이 올라가도 좋으니 정해진 분량은 다 찍어달라”며.

“매력있는 배역이었어요. 작품성은 물론 흥행성도 있고.”


박희순은 <가비> 시나리오를 읽고 극단 목화에서 올린 <도라지>의 고종(성지루)이 떠올랐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임금이었다. 반면 <가비>의 고종은 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커피향에 외로움을 달래면서 암울한 상황을 헤쳐나가려는 임금이었다. 박희순은 식민사관에 의해 폄하된 고종이 아닌 다른 고종을 보여주고 싶었다. 키워드는 ‘외유내강’. 박희순은 <가비> 시나리오는 물론 영화의 원작인 <노서아 가비>(김탁환>와 함규진 교수의 <고종, 죽기로 결심하다> 등을 탐독하면서 캐릭터를 구축했다.

“배역에 다가가려고 노력해요. 제게로 끌어오지 않고.”

박희순은 이때 고종의 두 대사를 축으로 삼았다. ‘나는 가비의 쓴맛이 좋다. 왕이 되고부터 무얼 먹어도 쓴맛이 났다. 헌데 가비의 쓴맛은 오히려 달게 느껴지는구나’와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만들 것이다’를 축으로 고종의 심경과 의중을 각기 달리 펼쳐냈다.

이 과정에 ‘일리치’를 독대하는 장면에서는 거듭 엔지(NG)를 냈다.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은 명성황후, 전속 바리스타 ‘따냐’, 고초를 치르는 백성, 그리고 일본에 주권을 넘긴 뒤 고종이 대성통곡을 했다는 문헌 등이 떠올라 매번 눈물이 나온 것이다.

서너 차례 찍은 뒤 장 감독은 박희순에게 이번에는 울지 않는 것으로 가자고 했다. 편집할 때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겠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희순은 대여섯 번째 촬영 때까지 눈물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눈물은 후반작업 때 CG로 지워야 했다.

“박희순이라면 울지 않았겠죠. 고종은…. 어쨌든 안타까워요. 고종을 재조명한 한국영화가 한 편도 없다는 게. <마지막 황제>(1987) 같은 영화를 생각하면 더욱 그래요. 아쉽지만 <가비>로 이 만큼이라도 고종의 진면목을 보여줬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봐요.”

<간기남>은 간통사건 담당 형사가 쓴 에세이가 원작이다. 박희순은 이를 극화한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대중이 쉽게 다가올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둘러 가지 말고 곧바로 직행해서 대중과 소통해 보자고 마음 먹었다.

“자부심·자긍심도 관객이 알아줄 때 빛이 나요. 상도 대개 흥행을 해야 받을 기회가 주어지고. 관객이 외면하면 혼자 예술한 거나 다름없죠. 좋은 영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인지도를 넓히고 싶었어요.”

형사 역 비중이 여간 아니다. 박희순은 62회차 촬영 중 무려 60회차를 나갔다. 이번에도 자신을 버리고 형사 역에 다가갔다. 좌충우돌 하면서 의뢰인(박시연)에게 사랑을 느끼는  등 <간기남>에 담긴 수사·코믹·멜로 등의 장르 특성을 한껏 살려냈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형사가 자주 쓰는 낱말과 그 특유의 어투를 기록하고 익혀 애드리브도 그 범주에서 튀어나오도록 했다.

박희순은 <가족>(2004)의 악역으로 주목받은 뒤 <남극일기>(2005) <러브토크>(2005) <세븐 데이즈>(2007) 등을 통해 영화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세븐 데이즈>로 대한민국 영화대상과 청룡상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작전>(2009)으로 이천 춘사대상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우리집에 왜 왔니>(2009) <10억>(2009) <맨발의 꿈>(2010) <혈투>(2010) <의뢰인>(2011) 등에 출연했다.

‘연기파 배우’로 손꼽히는 박희순은 TV드라마 출연에 대해 “연극이나 영화와 제작 시스템이 달라 두려움이 없지 않다”고 했다. “연극을 하다가 영화를 하는 데 10년 이상 걸렸고, 영화를 한 지 10년이 됐다”며. “어떤 가시적인 열매를 맺는 데에는 10년 이상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며. 이어 “좋은 드라마로 시청자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배우로서 인지도를 높이고 싶다”고 기원했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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