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겨울, 부산 거리에 벚꽃이 활짝피었다. 실제 상황이 아니다. 영화 <봄, 눈>(감독 김태균·제작 판씨네마)의 한 장면이다. 여주인공 ‘순옥’(윤석화)이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에 남편(이경영)과 함께 벚꽃 휘날리는 거리를 바라보며 옛 추억에 잠기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11월 말, 쌀쌀한 초겨울의 찬바람이 제법 매서울 때 찍었다. 장소는 부산 대신동의 한 거리. 부산에서 으뜸으로 손꼽히는 벚꽃길이다. 전인한 미술감독은 <봄, 눈>의 한 장면 촬영을 위해 11월의 대신동 4차선 거리를 벚꽃이 만개한 4월의 꽃길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느라 ‘벚꽃 전쟁’을 치렀다(영화미술 전문제작사 ‘세발자전거 필름’ 대표인 전인한 미술감독은 일본 치오다 공업예술대학 건축인테리어학과 출신으로 영화의 경우 그간 <8월의 크리스마스> <시월애> <봄날은 간다> <태극기 휘날리며> <장화, 홍련> <태풍> <리턴> <식객> 등 40여 편의 미술이나 세트작업을 맡았다).

전투적 작업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종이로 꽃잎을 만들고, 구입한 실제 꽃 가지에 인조 꽃잎을 붙이고, 이 가지를 기존 나뭇가지에 부착하고, 꽃잎을 거리에 깔고 날리는 작업이다. 벚나무는 꽃이 진 뒤에 잎이 돋아 잎 작업은 하지 않았다.

꽃잎은 얇은 한지, 연등 등을 만드는 종이로 만들었다. 분홍색과 흰색 두 가지로. 20㎏짜리 자루로 서른 자루를 만들었다. 미술 담당 5명, 소품 담당 3명, 세트 담당 2명 등 모두 10명이 달려들어 1주일 동안 작업한 끝에. 열 자루의 꽃잎은 나뭇가지에 붙이는 데, 스무 자루의 꽃잎은 거리에 깔고 바람에 흩날리게 하는 데에 사용했다.

2.5~3m 길이의 나뭇가지는 한 조경업체에 의뢰해 구입했다. 마른 실제 벚꽃나무 가지는 잘 부러져 벚나무와 색깔이 유사한 버들나무 가지 등을 구입했다. 구입한 나뭇가지는 2.5t 분량. 제작진은 이 나뭇가지에 인조 꽃잎을 붙이고, 이를 기존 나뭇가지에 붙이는 작업을 했다. 1차 작업을 마친 날 밤에 비가 오고 바람까지 부는 바람에 다음날 1t 분량을 추가로 만들어 새벽부터 보완 작업을 했다. 인조 꽃잎을 구입한 나뭇가지에 붙이고 이 가지를 기존 나뭇가지에 부착하는 작업에는 총 보름이 걸렸다. 미술팀은 물론 연출·촬영·조명 등 제작진 70여명이 모두 참여했다.

이렇게 조성한 벚꽃 길 거리는 100m 정도. 이 길 끝에서 이어지는 영화상의 꽃길 장면은 CG로 구현했다. 거리를 비롯해 주변 건물, 아파트, 상가에서 꽃잎이 흩날리게 하는 데에는 강풍기를 동원했다.

벚꽃길 조성 작업에는 이렇듯 총 3주가 걸렸다. 경비는 인건비를 제외하고 1000만원이 들었다. 촬영은 반 나절 만에 끝났다. 제작진은 공들인 시간이 긴 데 비해 촬영이 빨리 끝나 허무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서로를 부둥켜 안고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그간의 노고를 잊었다. 두 번 다시 목격하기 힘든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는, 남다른 추억을 아로새기는 동네 주민들 등과 함께 초겨울의 벚꽃길을 만끽했다.

제작진 가운데 전인한 미술감독은 벚꽃 전쟁을 치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김정권 감독의 <동감>(2000)에서도 한겨울에 꽃이 피고 지는 봄의 캠퍼스를 구현해 낸 적이 있다. 전 감독은 “한겨울에 대구 계명대에서 캠퍼스의 봄을 조성했다”며 “당시 시기는 꽃이 지면서 잎이 나오는 때여서 벚꽃 등 두세 종류의 꽃과 잎도 만들어 붙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경험이 이번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김태균 감독은 “남녀 주인공 등 사람들과 차량이 오가는 거리는 사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미술작업을 강행했다”며 “작업을 하기에 앞서 미술감독 등과 CG로 시뮬레이션을 했다”고 밝혔다.

한편 차태현·김선아 주연의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감독 이건동)에서는 ‘트리 전쟁’을 치렀다. 2003년 12월17일에 개봉된 이 영화는 한여름에 찍었다. 여러 가지 여건상 한겨울까지 기다렸다가 촬영하는 게 가능하지 않았다. 설사 개봉을 한 해 뒤 크리마스 때로 미룬다 하더라도 촬영을 실제로 눈이 오는 날에 맞춰 하는 게 용이하지 않고, 극중 분위기에 맞게 눈이 온다는 보장도 없어 한여름에 촬영을 강행했다.

촬영과정에 어려움이 많았다. 거리에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드는 것도 관건 가운데 하나였다. 제작진은 이를 위해 20일에 걸쳐 대전시의 협조를 받아 유성구 봉명동 온천거리에 11m 높이의 화려한 대형 트리를 세웠다. 그런데 이 트리 주변의 나무들이 문제가 됐다. 계절이 한여름이다 보니 나뭇잎이 무성했던 것이다.

카메라 앵글을 아무리 조정해도 잎이 무성한 나무를 피할 수 없었다. 잎을 모두 떼내는 수밖에 없었다. 제작진은 이를 위해 나무병원에 조언을 구했다. 잎을 모두 제거하더라도 생육증진제 등 수관주사를 놔주면 나무가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다는 소견을 듣고 유성구의 승인을 받아냈다. 카메라 앵글에 걸리는 5그루 나무의 입을 모두 일일이 떼어낸 뒤 촬영을 마쳤다. 현장 주변 팻말에 연유를 상세히 적어 고지했지만 일부 시민들은 혀를 차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봄, 눈>은 우리네의 평범한 엄마가 가족들과 가슴 아픈 이별을 맞는 과정을 그렸다. 김태균 감독이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로 각본을 쓰고 연출도 맡았다. <레테의 연가> 이후 24년 만에 영화에 출연한 윤석화씨는 실제로 삭발을 감행하는 등 열연을 펼쳤다. 오는 26일 개봉된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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