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다수’. 무명배우는 물론 스타들 역시 데뷔 초에는 엔드 크레디트(End Credit)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외(外) 다수(多數)에 속하고는 했다. 예명이 ‘외다수’라고 소개한 이도 없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요듬 드라마 <신사의 품격>으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장동건이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선 작품은 세제 광고였다. 장동건은 여주인공(박순애) 뒤에 서서 “참 잘 빨려요”라고 말하는 인물로 출연했다. 그런데 방송에는 그의 몸 일부와 손만 나왔다.

 

장동건의 첫 드라마 출연작은 MBC 드라마 <아들과 딸>이었다. 장동건은 갓 입사한 동기들과 함께 나무(木)로 출연했다. 주인공(최수종)이 지나가는 길옆에 숨어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신사의 품격>에서 장동건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김수로의 영화 데뷔작은 <투캅스>(1993)다. 강우석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에 김수로는 ‘강 형사’(박중훈)이 출근할 때 인사하는, 경찰서 정문에 서 있는 전경으로 출연했다.

 

 

차인표·김주혁 등이 맡은 첫 배역도 스타덤에 오른 뒤와 비교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로 들린다. 차인표는 첫 출연작이 MBC <집중 퀴즈테크>였다. 진행자가 낸 문제를 재현해 보여주는 영상물에 귀신으로 나왔다. 요즘 드라마 <무신>으로 주목받고 있는 김주혁은 SBS 드라마 <홍길동>에서 포졸을 맡았다. 뇌물로 받은 굴비를 들고 지나가면서 좋아하는 연기를 했다.

 

 

송강호·설경구·황정민·이문식·조재현 등 연극배우 출신 연기파 스타들도 첫 영화에선 단역을 맡았다. 송강호는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 주인공(김의성)의 친구인 작가, 설경구는 장선우 감독의 <꽃잎>(1996)에서 여주인공(이정현)의 오빠, 황정민은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에 주인공(박상민)이 들은 우미관의 웨이터로 출연했다. 

 

이문식은 김용태 감독의 <미지왕>(1996)으로 데뷔했다. 주인공 ‘왕창한’(조상기)이 이용하는 택시의 기사로 출연했다. 이어 배창호 감독의 <러브스토리>(1996)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7)에서 동네 건달, 김성수 감독의 <비트>(1997)에서 동사무소 직원 역을 맡았다.

 

 

하나 같이 보잘것없는 배역으로 <비트>의 경우 재미나는 에피소드를 남겼다. 김성수 감독이 연극을 보러 왔다가 팸플릿에 이문식을 소개하는 글에 <비트>가 적혀 있자 제작진에게 “내가 ‘비트’ 감독인데 어떤 역을 맡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홍보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줄 알고.

 

조재현의 영화 데뷔작은 고영남 감독의 <매춘2>(1989)이다. 그는 조역 호스티스의 동생으로 출연했다. 누나의 죽음에 통곡하는 인물인데 조재현은 눈물이 나오지 않아 곤혹을 치렀다. “어디서 이런 ××를 데려왔느냐”고 자신을 소개해준 친구까지 혼나게 만들었다. 친구는 이 영화의 스크립터였다.

 

사실 카메오나 단역의 경우 편집과정에서 잘리는 경우는 적지 않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차승원, <유령>의 정은표, <베사메무쵸>의 최일화가 겪은 에피소드가 그 일례이다. 

 

차승원은 김상진 감독의 <주유소 습격사건>(1999)에 극중 주유소 부근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폭주족으로 출연했다. 촬영기간은 3일. 그런데 완성된 영화에서 그는 눈만 조금 보인다. 두 눈을 부릅뜨고 보지 않으면, 아니 부릅뜨고 봐도 폭주족이 차승원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편집에서 많은 장면이 잘리는 바람에 그가 <주유소 습격사건>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관계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정은표는 민병천 감독의 <유령>(1999)에 잠수함 내 조리장으로 나왔다. 촬영에 앞서 그는 민 감독으로부터 조리장보다 출연 장면이 더 많은 인물을 제의받았다. 정은표는 그 배역이 적잖이 욕심이 났다. 그런데 그  인물은 '부함장'(최민수)이나 '찬석'(정우성) 등 주인공과 크게 관련이 없는 주변인이었다. 개성있는 인물이지만 편집작업을 할 때 러닝타임에 쫓기다 보면 통째로 빼도 무방해 보였다. 정은표는 민 감독의 제의를 고사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모든 장면이 살았다면 조리장보다 더 눈길을 끌만한 배역이었지만 정은표의 분석대로 그 인물은 편집에서 모두 삭제되고 말았다.

 

최일화는 전윤수 감독의 <베사메무쵸>(2001)에 '철수'(전광렬)의 돈을 떼먹고 도망간 친구로 나왔다. 그는 극중 말미에 철수에게 “미안하다”며 “나중에 네 돈은 꼭 갚도록 하겠다”고 울먹인다. 철수는 그런 그에게 차비를 쥐어준다. 그러나 이 장면은 모두 잘리고 말았다.

 

김대우 감독의 <음란서생>(2006)에서 궁궐을 나온 ‘윤서’(한석규)는 뒷짐을 지고 저잣거리를 걷는다. 가마가 그의 뒤를 따른다.

 

 

한석규는 이 장면을 찍으면서 감회가 새로웠을 듯하다.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1990년 KBS 성우로 데뷔, 91년 MBC 탤런트로 새 출발한 그의 첫 출연작이 베스트셀러극장 <다리>였고 맡은 배역이 가마꾼1이었던 것이다. 

 

동기들과 함께 가마꾼 역을 맡은 한석규는 이 때부터 남달랐다. 자신이 전후좌우 어디에 위치한 가마꾼인지, 어떤 행차인지 등을 묻고 준비를 철저히 한 뒤 연기에 임했다. 춘사 나운규(1902~37)의 첫 배역이 가마꾼이었던 점을 상기, 그처럼 큰 인물이 되겠다면서.

 

그런데 가마 행차 장면은 먼 거리에서 롱 쇼트(long shot)로 촬영, 그의 연기는 빛을 보지 못했다. 가족과 함께 <다리>를 시청한 한석규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야 했다. 그의 모습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이다.

 

배우들은 어떤 배역이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 ‘적은 배역은 없다’는 말을 경구(警句)로 삼고 있다. 유명 배우들은 무명 때부터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철저하게 실천한 이들이다.

 

황병국 감독의 <나의 결혼원정기>(2005)에서 ‘만택’(정재영)은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끝은 창대하였다”고 회상한다. 이 대사는 무명의 설움을 딛고 은막과 안방극장에서 각광받고 있는 배우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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