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51)은 1996년 <악어>로 데뷔, 올해 <피에타>까지 열여덟 편을 만들었다. 세 번째 작품 <파란대문>(1998)부터 <피에타>까지, 이른바 3대 국제영화제에만 열 편(칸-세 편, 베를린-세 편, 베니스-네 편)이 초청받았다. 2004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열 번째 작품 <사마리아>로 ‘은곰상’(감독상), 같은 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열한 번째 작품 <빈집>으로 각각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열여섯 번째 작품 <아리랑>으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그랑프리를 받았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한국의 저예산 독립영화를 대표한다. 6일 개봉되는 <피에타> 역시 한 달 동안 12회 차 촬영을 거쳐 완성했다. 악마 같은 강도(이정진) 앞에 어느 날 엄마라는 여자(조민수)가 찾아오면서 두 남녀가 겪는 혼란과 잔인한 비밀을 그렸다. 극단적 자본주의 세계에서 빚어지는 사람들 간의 충돌을 조명했다. 피에타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을 지녔다.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어떤 성적을 거둘는지, 국내 관객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는지 주목된다. 

 

■ 맞춤법 모른 채 시나리오 작업

김기덕 감독은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다. 졸업 후 청계천의 공장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세차장 등에도 다녔다. 그림과 사진을 독학으로 깨쳤다. 감독이 되는 과정에 대부분 거치는 연출부 생활도 하지 않았다. <양들의 침묵> <퐁네프의 연인들> 등, 영화를 처음으로 본 것도 서른두 살 때였다.

해병대 복무를 마친 뒤 출국, 3년 동안 프랑스에서 지냈다. 그림을 그려 거리 전시회를 갖고 판매한 돈으로 생활했다. 1993년 봄, 일시 귀국했다가 우연히 한 신문에 난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전신)의 시나리오 공모 광고를 본 걸 계기로 진로를 바꿨다.

김 감독은 자신의 프랑스 생활 경험담 등을 소재로 방송사 6부작 드라마와 장편 영화 시나리오를 써서 출품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원래 계획대로 다시 프랑스로 가자는 마음 한 켠에 오기가 발동,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부설 영상작가전문교육원 기초반에 등록했다. 주간반인데 야간반까지 도강을 하면서 6개월간 수업을 받았다.

수강생은 대학 국문과·문예창작학과 출신과 이미 영화 현장에서 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김 감독은 영화 기초는 물론 맞춤법조차 엉망이었지만 주눅들지 않았다. 과제물인 단편 시나리오를 쓰는 동료들과 달리 오기와 뚝심으로 장편 창작에 몰두했다. 세 편을 완성, 교육원 내 창작상에 출품했다. 응모작은 다섯 편에 불과했지만 김 감독의 작품은 세 편 모두 수상하지 못했다.

김 감독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문반에 등록했다. 6개월간 수업을 받으면서 또 세 편을 완성, 창작상에 내놓았다. 수료식 때 <화가와 사형수>로 대상을 수상, 10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달라지는 게 없었다. 작가라고 불러주는 이도 없었고 영화사에서 찾아주지도 않았다. 다시 연구반에 등록, 장학생으로 공부하면서 두 달에 한 편씩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전에 계속 출품했다. 예심에서 두 번 떨어지고 1993년 말 세 번째 응모 때부터 본심에 올랐다. <검은 해병>이 34강, <배>가 24강, <이중노출>이 8강에 올랐다. 그리고 1995년 7월 <무단횡단>으로 대상을 수상, 충무로에 입성했다.

<무단횡단>은 처음에는 예심에서 떨어졌다. 심사를 맡았던 박철수 감독이 옆방의 심사위원들에게 갔다가 예선 탈락작 가운데 하나인 <무단횡단>을 우연히 읽고 본인 심사 시나리오에 첨부해 본선에 올렸고, 전체 심사 결과 대상을 받았다.

 

■<악어> 제작사 세 번 바뀐 끝에 완성
김 감독은 대상 수상 후 한맥영화사와 하명중영화제작소 전속 작가로 활동했다. 영화사에 본 충무로 상황은 열악했다. 영화사와 자신이 지향하는 영화도 달랐다. 김 감독은 사표를 내고 데뷔작 준비에 들어갔다. 성동구 자양동에 살면서 성수대교·한강대교 등을 오가면서 곧잘 목격했던 자살사건과 시체를 건져주면서 살아가는 일명 ‘머구리’를 소재로 <악어>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투신자살한 이들의 시체를 숨겨두었다가 유족에게 넘겨주고 받은 돈으로 살아가는 부랑자(조재현)의 삶과 죽음을 그렸다. 현장 취재, 자료 수집을 거쳐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전국의 계곡·수영장을 뒤져 수중촬영 대안까지 마련했다.

제작~개봉 과정은 지난했다. 제작자들은 김 감독의 연출부 경험이 전무한 점 등을 놓고 시나리오만 팔 것을 요구했다. 김 감독은 돈보다 연출을 고집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 제작사의 요청으로 제작자가 선정한 촬영감독에게 테스트까지 받고 시나리오·미술감독료까지 포함해 500만원을 받고 연출도 맡았다.

주인공 ‘용패’ 캐스팅도 난항을 거듭했다. 출연료·일정 등의 문제로 최재성·박상민·한석규 등의 캐스팅이 물거품이 된 뒤 조재현이 남다른 조건 없이 출연을 결정,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 촬영한 장면들은 연출 미숙으로 모두 버려야 했다. 2억여원의 제작비가 추가될 상황을 맞으면서 중단 직전까지 간 끝에 가까스로 완성할 수 있었다. 4개월여 촬영 도중 제작사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김 감독은 이 과정에 촬영감독에게 핀잔을 많이 들었다. 한 제작자에게는 맞기까지 했다. 수중촬영장을 재점검하느라 촬영장에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도착한 게 화근이었다. 김 감독은 울면서 김밥을 먹은 뒤 스태프를 다시 규합, 촬영을 재개했다.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촬영·제작 중단은 피해야 했기에. 이 제작자는 조재현의 중재로 김 감독에게 사과했다.

촬영 중에는 현장 인근 다리에서 세 명이 투신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 명은 사망했고 두 명은 구조됐다. 출동한 구조대와 경찰, 머구리들의 실제상황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이 충격으로 며칠간 촬영이 중단됐고, 장마로 모든 자재가 물에 잠기기도 했다.

마지막 촬영은 수중장면이었다. 세트 회사에서 2000만원을 요구하자 김 감독은 재료를 구입하고 인부를 고용해 700만원을 들여 수중 세트를 만들었다. 한강대교 교각 세트를 올림픽수영장 5m 풀에 집어넣고 바닥에 모래를 깔아 촬영을 했다. 조재현은 72시간 동안 물 속을 드나들며 사투를 벌였다.

 

영화를 완성한 뒤에 김 감독은 극장주를 찾아다녔다. 영화를 보고 개봉해 달라고. 그런 끝에 서울 명보극장에서 1996년 11월 16일에 개봉, 3284명(한국영화연감 기준)이 관람했다. ‘얼치기 아마추어 영화’ 등 혹평과 더불어 ‘어설프지만 모든 걸 뛰어넘으려는 주목할 영화’ 등 잠재력도 인정받았다. 천리안·나우누리·유니텔 영화동호회 회원들은 합동 유료 시사회를 마련, 동전까지 모아 김 감독에게 전했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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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 2012.09.26 0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