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49)은 <8월의 크리스마스> (1998)로 데뷔했다. 평단과 관객의 사랑을 아우른 이 작품을 비롯해 <봄날은 간다>(2001) <외출>(2005) <행복>(2007) <호우시절>(2009) 등을 연출, 한국 멜로영화의 역사를 새로 써왔다. 최근 감수성 짙은 예전 작품들과 궤를 달리 하는, 강렬한 드라마와 감정 묘사가 돋보이는 <위험한 관계>를 내놨다.

 

 

#이번 기회에 영화, 한 번 해볼까?
늙은 아버지보다 먼저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진사 ‘정원’(한석규), 고단한 현실에 발을 막 들여놓은 주차 단속원 ‘다림’(심은하). <8월의 크리스마스>는 이들의 스쳐 지나가는 듯한 만남과 그 속에서 싹 트는 순백의 사랑을 그렸다. 둘의 잔잔한 만남과 이별 이야기에 삶과 죽음에 관한 화두를 담았다.


상하이 최고의 바람둥이 ‘셰이판’(장동건)과 돈과 권력을 다 지닌 신여성 ‘모지에위’(장바이즈·張柏芝), 정숙한 미망인 ‘뚜펀위’(장쯔이·章子怡). <위험한 관계>는 이들의 각기 다른 만남과 그 사이에서 펼쳐지는 욕망의 여로를 담았다. 섹스로 섹스를 거래하는 셰이판과 모지에위, 이 내기에 함몰되는 뚜펀위를 통해 사랑의 종말과 복원을 그렸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대종상·청룡영화상·황금촬영상 신인감독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았고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받았다. 서울에서 42만2930명(한국영화연감 기준)이 관람, 1998년도 한국영화 흥행 4위를 차지했다. <위험한 관계>는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을 비롯해 토론토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 초청받았다. 지난 11일 개봉, 15일까지 15만9068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이 관람했다.

<위험한 관계>는 드라마가 강렬하고 전개 또한 빠르며 각 등장 인물의 감정 묘사도 끝을 본다. 삶과 사랑을 성찰하고 사유하게 하는 멜로영화 감독으로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허 감독의 달라진 영화 세계와 이후의 행보를 기대하게 한다.

 

그런 그는 연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대우전자 홍보실에서 2년쯤 언론 담당으로 근무했다. 맡은 일에 회의가 밀려들고 회사원으로 지내는 게 갑갑했던 그는 어느 날 불쑥 사표를 냈다. 대학원에 진학, 철학을 전공하려고 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영화에 관심이 없었다. 평범한 관객 수준에도 못 미칠 정도로 본 영화도 적었다.

영화감독은 꿈도 꾼 적이 없던 그는 우연히 영화진흥위원회 부설 한국영화아카데미 신입생 모집 공고를 본 걸 계기로 영화에 입문했다. 그는 “마음 한 구석에 영상문화에 대한 관심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면서 “어쨌든 아카데미 신입생 모집 공고를 보지 않았으면, 합격하지 않았으면, 지금 영화를 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는 1984년에 개교, 올해 29기 신입생을 뽑았다. 연출·촬영·프로듀싱·애니메이션 분야에서 2012년 현재 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국내외에서 한국영화의 위상을 드높인 이들 가운데 김태용·박찬욱·봉준호·임상수·최동훈 감독 등 유명 영화인들이 즐비하다. 허진호 감독은 1992년 9기로 입학, 1993년에 졸업했다.

허진호는 아카데미 동기 유영식과 함께 연출한 아카데미 졸업작품 <고철을 위하여>로 밴쿠버국제영화제에 초청받는 등 가능성을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졸업 후 박광수 감독의 연출부로 충무로에 입문, <그섬에 가고 싶다>(1993)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작업에 참여했다. 고교 교사를 그만두고 영화계에 뛰어든 이창동을 비롯해 박기홍·박흥식·성지혜·오승욱·유영식 등과 함께 현장 수업을 받았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때에는 김정환·이창동·이효인 등과 각본 작업도 함께했다.

 

 

# 멜로영화에 담는 삶과 죽음의 철학 

허진호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를 요절한 가수 김광석의 영정 사진을 보고 기획했다. 김광석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에 ‘영화적 충격’을 받은 그는 곧바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시력을 잃어가는 사진사가 점점 더 밝은 대상을 찾아 사진을 찍는다’는 한 신문 기사를 읽고 남자 주인공은 사진사로 설정했다. 훗날 그의 죽음을 애잔한 미소로 추억하는 여자 주인공은 주차 단속원으로 정했다. 주차 위반 차량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로 제출하는 여자는 매일 남자의 사진관에 들러 인화를 맡기고 찾아간다.

영화는 이들의 만남과 이별을 그렸다. 허 감독은 남자가 맞닥뜨리는 죽음의 과정을 여느 영화와 달리 고통과 비극이 아니라 일상의 한 범주로 다뤘다. 각본·연출 작업 때 말기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들과의 숱한 만남과 대화를 상기했다.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일상과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담아냈다.

제작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영화 제목은 원래 황동규 시인의 시에서 따온 <즐거운 편지>였다. 박신양·최진실 주연의 <편지>(1997)를 감안, 제목을 바꿨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제작자인 전 우노필름의 차승재 대표(현 한국영화제작가협회장,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가 지었다. 정원과 다림이 만나고 헤어진, 여름과 겨울을 하나로 잇는, 삶과 죽음의 다름과 같음을 읽게 하는 제목으로 주목받았다.

제작비는 삼성영상사업단 등에서 외면, 일신창업투자로부터 받았다. 남녀 주인공을 캐스팅하는 데에는 3개월 정도가 걸렸다. 1순위는 한석규·심은하였다. 한석규는 <쉬리> 제작이 지연되면서, 심은하는 제작진이 김현주와 최강희를 만나고 온 날 연락을 받아 가까스로 원안대로 촬영할 수 있었다.

촬영은 9월부터 12월 초까지 했다. 서울과 익산의 화장터 등 일부 장면을 빼고 모두 군산에서 찍었다. 극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남자의 ‘초원사진관’은 한 차고를 개조한 것이다. 세트 촬영을 배제, 제작진은 전국의 사진관을 뒤졌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어느 날 지친 몸과 마음을 녹이던 한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여름 날의 묘한 느낌이 드리워진 차고를 발견한 뒤 이를 허물고 지은 사진관이다.

이 과정 또한 힘들었다. 한 달 동안 만나주지도 않던 차고 주인은 제작사의 수석 PD가 보낸 장문의 편지에 감동, 원상 복원을 조건으로 개조를 승낙했다. 이 곳은 처음 얼마간은 실제로 새로 사진관이 생긴 줄 알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극중에서 가족 사진을 찍는 이들은 실제 방문객 가운데 일부이다.

남자가 죽고 여자가 그 사실을 모른 채 사진관을 다시 찾아오는 장면에는 눈(雪)이 필요했다. 촬영시기는 11월 말이었고, 더구나 군산은 거의 눈이 오지 않는 지역이었다. 제작진은 결국 사진관 주변에 솜 200가마를 깔고 소금 300가마를 뿌려 눈이 내린 것처럼 꾸몄다. 촬영이 끝난 뒤 동네 아주머니들은 이 눈을 수거, 김장 때 쓰겠다고 했다. 제작진은 덕분에 청소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찾았던 초등학교 운동장에 눈이 흠뻑 내린 장면은 운좋게 보충 촬영 때 찍었다. 촬영을 앞둔 날 밤, 군산에 40여년 만에 폭설이 내린 것이다. 제작진은 하늘이 도와준다고 기뻐했다. 그런데 유영길 촬영감독이 첫 프린트 작업을 마친 뒤 작고, 울음을 삼켜야 했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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