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 감독(42)의 <원시림>이 제30회 토리노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국제경쟁’ 섹션에 초청받았다. 이 감독은 YTN 앵커, 영화전문지 ‘필름2.0’ 기자 출신으로 올해 <원시림>으로 데뷔했다. 이 감독은 주부로서 가사와 대학원 수업을 병행하면서 각본·연출 작업을 하느라 영화를 완성하는 데 2년이 걸렸다. 지난 23일 출국 전 만난 이 감독은 “후반작업에 공을 들이느라 시간이 더 많이 걸렸다”고 했다.

 

 

영화의 소재와 주제는 죽음이다. 외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외가에다 여자여서 장례식 때 이방인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지켜만 봐야 했던 게 <원시림>을 기획한 동기이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은 아름다운 꽃상여는 없고, 포클레인이 동원된 장례식이었어요. 현실적인 장례 모습이 내게는 오히려 비현실적이었고, 이 아이러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스마트폰으로 찍은 게 <원시림>을 만든 시발점이에요.”

이 감독은 영화를 구체화하면서 대학에서 공부한 종교학에 여성학적 관점을 풀어넣었고, 기독교와 설화를 대비시켰다. 대학원에서 배우는 실험영화의 특성과 형식도 도입했다.

<원시림>의 각본·연출 외 출연·편집, 일부 장면의 촬영도 맡은 이 감독은 다큐멘터리에 극영화를 가미했다. 기승전결식 서사구조를 따르지 않고,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땅이 위로 향하고 사람들의 머리가 아래로 보이거나, 하늘이 화면의 아래(땅이 위) 혹은 오른쪽(땅이 왼쪽)에 보이는 등 파격도 꾀했다.

영화는 시작된 지 10분이 지나도록 이 감독이 생화와 조화를 사는 걸 보여준다. 이 감독은 “일부러 재미없게 찍었다”며 “관객이 집중하기보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기 위한 의도”라고 설명했다. 이 감독은 생화와 조화로 외할머니의 집을 꾸미고 봉분을 장식한다.

이때 이 감독과 남동생 사이에 빚어지는 언행의 엇박자는 극영화의 재미와 더불어 남녀 간 가치관의 차이와 소통의 부재를 읽게 한다. 이 감독의 꿈, 외할머니의 산소, 호주 울룰루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는 실재와 환영을 아우르는 영상을 통해 출산·죽음·장례의 의미를 되새김하게 한다. 수시로 인·아웃되는 원시적 풍광, 봉분 위로 빛과 소리가 잇따라 뛰어넘는 장면은 ‘갤러리 필름’(설치미술)을 떠올리게 하면서 죽음 이전·이후의 세계와 존재를 느끼게 한다.

“코언 형제와 빔 밴더스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는데 미국에서 스탠 브렉키즈와 마야 대런 감독의 실험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이런 영화도 있구나, 저런 영화도 가능하구나’ 하는 호기심과 자신감을 갖게 됐고요.”

<원시림>은 토리노국제영화제에 초청받기 전에 제6회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와 제9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서 상영돼 주목을 끌었다. 이 감독은 “관객들에게 실험적이다, 상업적이다, 상반된 반응을 얻고 있다”면서 “평가가 어떻든 디지털 시대를 맞아 주부들도 영화를 만드는 게 가능해진 데 감사한다”고 했다. 이미 두 번째 영화 <용문>(龍門·가제)을 찍고 있는 이 감독은 “영화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꾀하고 싶다”고 했다.

토리노국제영화제는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그간 한국영화는 <벌이 날다> <살인의 추억> <얼굴 없는 미녀> <경의선> 등이 주요 상을 수상했다. 올해에는 <원시림> 외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가 새로운 경향의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극영화 부문’에 초청받았다. <원시림>과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이 12월1일(현지시간) 폐막식 때 어떤 성과를 거둘지 주목된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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