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42)은 <장군의 아들>(1990) <쉬리>(1999) 등의 단역을 거쳐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와 <로드무비>(2002)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바람난 가족>(2003) <여자, 정혜>(2004) <너는 내 운명>(2005) <달콤한 인생>(2005) <사생결단>(2006) <검은집>(2007) <그림자살인>(2009) <부당거래>(2010) <모비딕>(2011) 등으로 각광받았다. <댄싱퀸>(2012)에 이어 최근 <신세계>를 내놨고 <전설의 주먹>을 선보일 예정이다.

 

 

■고교생 때 극단 창단

‘연기파’ 배우 황정민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농구 선수를 했다. 마산 동중학교 1학년 때 천하장사 출신 방송인 강호동과 한 반이었다. 이들이 먼 훗날 유명 영화배우와 방송인이 될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2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오면서 농구를 그만둔 황정민은 학교에서 단체관람한 윤복희의 <피터팬>을 계기로 배우를 동경했다. 당시에 동네마다 있던 재개봉관은 그에게는 ‘시네마 천국’이었다.

황정민은 계원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 배우의 꿈을 키웠다. 일반 과목 수업과 달리 전공 과목 수업 때에는 눈빛이 달라질 정도로 전공 공부에 열정을 불살랐다. 이론 공부를 하고 공연을 하는 게 본능적으로, 마냥 좋았던 황정민은 급기야 초 강수를 두었다. 1989년 졸업을 앞두고 동기들과 청소년 극단 ‘창조’를 창단, 뮤지컬 <가스펠>을 계몽아트센터에서 올렸다. 대학은 재수해서 갈 수 있지만 공연은 미룰 수 없다고 판단, 학력고사를 포기하고 교사와 부모 몰래 공연을 감행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흥행에 완전 실패, 황정민 등은 많은 빚을 지고 말았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부모들은 스스로 벌인 일인 만큼 책임감을 느끼라고 일부를 갚아주면서 나머지는 본인들이 해결하도록 했다. 황정민은 “남은 빚을 차등 분배했는데 제비뽑기 과정을 거쳐 가장 많은 100만원을 갚게 됐다”면서 “임권택 감독님의 <장군의 아들>(1990) 오디션에 합격한 뒤 받은 출연료로 책임을 다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황정민은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1990)에서 오디션을 거쳐 우미관 지배인 역을 맡아 배우로 데뷔했다.

                    종로 일대를 장악한 ‘김두한’(박상민)은 우미관을 단골로 드나들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한다.  

 

<장군의 아들>에서는 우미관 지배인 역을 맡았다. 그런데 “마루오카 형사님 생신날이라…” 등 그리 길지 않은 대사를 계속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황정민은 “<테러리스트> 등의 김영빈 감독(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조감독이고 <바람난 가족> <그때 그 사람들> <하녀> 등의 임상수 감독이 연출부 막내였는데 ‘뭐 하는 놈이냐’는 꾸중을 듣고 얼마나 창피했는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기억했다. “<장군의 아들2> 제의를 받았지만 자신감이 없어 포기했다”고 덧붙였다.

황정민은 프로 무대의 벽을 절감, 공부를 더 하기 위해 1990년 서울예대 연극과에 진학, 무대미술을 전공했다. 현역 배우 가운데 정재영·류승용·임원희 등이 동기이다. 황정민은 무대미술을 전공한 데 대해 “연기는 평생할 거니까 학교에서는 다른 걸 배우고 싶었고 그 경험이 연기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1991년에 입대, 1993년에 복학, 1994년에 졸업한 황정민은 극단 ‘학전’과 ‘현대극장’에서 활동했다. <지하철 1호선> <모스키토> <의형제> <개똥이> <다시 피는 꽃>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캐츠> 등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는 영화 <쉬리>(감독 강제규)에서 배우 장현성의 소개로 단역(특별조사반)을 맡기도 했다. 황정민은 “강제규 감독의 작품인 데에다 당대 최고 배우인 한석규 형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고 떠올렸다.

                황정민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순박한 드러머로 출연, 제1회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

                     했다. 1년 뒤 <로드무비>에 동성애자로 출연, 각 영화상 신인남우상을 독차지하면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배우는 내 운명
연극·뮤지컬 무대를 통해 자신감을 쌓은 황정민은 이후 영화 오디션에 계속 응모했다. <박하사탕>(감독 이창동)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감독 박흥식) <친구>(감독 곽경택) 등 1999년 전후에 개봉된 영화 오디션은 모두 봤다. <박하사탕> 외에는 모두 떨어졌다. <박하사탕>은 오디션에 합격한 뒤 단체사진까지 찍었는데 연극 공연과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출연하지 못 했다. 황정민은 배우가 되는 걸 포기하고 친구가 있는 괌으로 가 관광가이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명생활이 너무 힘들고, 비전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런 중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본 오디션에 합격한 것이다. 당시 오디션은 <와이키키 브라더스> <와니와 준하> <수취인 불명> <선택> 등 6개 작품이 동시에 진행됐다. 충무로 사상 최대로 손꼽힌 이 오디션은 3지망까지 가능했다. 황정민은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지망하지 않았지만 임순례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이 영화는 지방의 밤무대를 전전하는 삼류밴드의 척박한 삶을 그렸다. 2001년 제2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화제를 낳았다. 황정민은 우직하고 순박한 드러머 ‘강수’로 출연 이얼·박원상·오지혜·류승범 등과 호흡을 맞췄다. 제1회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1년 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과 삶을 다룬 <로드무비>(감독 김인식)에 동성애자로 출연, 정찬·서린 등과 함께했다. 제23회 청룡영화상·제2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제3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남우상을 수상했다.

                 황정민은 <달콤한 인생>과 <너는 내 운명>으로 2005년 각 영화상의 남우조연상과 주연상을 휩쓸었다.

 

남우조연상을 먼저 수상한 뒤 신인상을 받은 황정민은 2005년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달콤한 인생>(감독 김지운)의 비열한 조직폭력배로 제4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 제4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너는 내 운명>(감독 박진표)의 순박한 농촌 총각으로 제26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과 대한민국 영화대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청룡영화상 수상 소감으로 밝힌 ‘밥상·숟가락론’으로 장안의 화제를 낳았다. <너는 내 운명>은 제29회 황금촬영상 최우수남우상도 받았다. 제4회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진기록을 낳은 그는 2007년에는 <사생결단>(감독 최호)으로 제7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2011년에는 <부당거래>(감독 류승완)로 제15회 몬트리올 판타지아 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신세계>의 황정민. 밑바닥에서 출발, 거대 범죄조직의 2인자가 된 ‘정청’으로 등장, 최민식ㆍ이정재 등과

                      함께 영화의 재미는 물론 연기를 감상하는 재미도 안겨준다.

                      

최근작 <신세계>(감독 박훈정)는 살얼음판을 걷는 세 남자의 삶을 그린 범죄영화다. 황정민은 국내 최대 범죄조직의 2인자 ‘정청’으로 출연했다. 비상한 머리에 잔혹성을 갖춘, 의리를 잃지 않는 건달로 열연을 펼쳤다. 최민식이 범죄조직 와해 작전을 펼치는 경찰 간부 ‘강 과장’, 이정재가 강 과장의 작전에 따라 범죄조직에 잠입한 경찰이지만 정청이 친동생처럼 아끼는 ‘자성’ 역을 맡았다. 세 남자의 개성있는 캐릭터와 실감나는 연기 대결이 재미를 더해주는 이 영화는 개봉 사흘 만에 100만 명이 넘게 관람하는 등 호평받고 있다.

다음 영화는 오는 4월에 개봉되는 <전설의 주먹>(감독 강우석)이다. 고교 시절 주먹으로 일대를 주름잡았던 세 남자가 25년 뒤 리얼액션 TV쇼에서 만나 다시 펼치는 마지막 승부를 다뤘다. 황정민은 복싱 챔피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국수집 사장으로 살던 중 딸을 위해 TV쇼에 출연한 ‘임덕규’ 역을 맡아 유준상·윤제문·이요원·정웅인·성지루 등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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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리(38)는 <박하사탕>(2000)으로 데뷔했다. <오아시스>(2002)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상(신인배우상)을 수상, 월드스타로 등극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연기상,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받은 뒤 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는 신인여우상과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옥관문화훈장도 받았다. <바람난 가족>(2003)으로 대종상영화제·시애틀국제영화제·대한민국 영화대상 등의 여우주연상, <하하하>(2009)로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분노의 윤리학>에 이어 <협상종결자> 개봉을 앞두고 있다.

 

■대학이냐, 오디션이냐
한 편의 영화(연극)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평범한 여고생이던 문소리가 배우가 된 것도 이에 해당한다.

<에쿠우스>. 문소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연극이다. 신구·최민식이 주연을 맡았다. 1990년 여고 1학년 때 문소리는 이 연극을 본 뒤부터 배우를 동경했다. 1993년 성균관대 교육학과에 입학한 뒤 연극·국악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3학년 1학기 때에는 기성 극단 한강에 입단했다. 우편물 작업 등 사무보조를 하면서 청소도 했다.

그런 중 창작극 <교실 이데아>로 데뷔했다. 다른 배우들과 달리 연습이 한창 진행되던 중간에 들어갔다. 극중에서 배우들이 다루는 악기가 하모니카 등에 지나지 않아 보완이 필요했다. 문소리는 중학생 때부터 바이올린을 켤 줄 알았다. 덕분에 부잣집 여학생 역을 맡아 예상보다 빨리 무대에 섰다.

연극 공연 외 판소리·발레 등을 배우고 익히느라 문소리는 동기들보다 대학을 1년 반 늦게 졸업했다. 문소리는 지식과 실력을 쌓고 인맥을 넓히기 위해 서울예대 연극학과를 지망, 합격했다.

 

그 무렵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2000) 오디션에 경험 삼아 응모했다. 될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잇달아 예심을 통과, 고민에 빠졌다. 최종 합격이 불투명한 가운데 오디션을 포기해야 할지, 대학을 포기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문소리는 고민 끝에 대학을 포기했다. 2~3개월이 걸린 오디션에 최종 합격, ‘영호’(설경구)의 첫사랑 ‘순임’ 역을 맡았다.

이창동 감독은 당시 남자주인공은 신인으로 하더라도 여자주인공은 유명 배우로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오디션 때 얼굴부터 목까지 붉어지며 연기하는 문소리가 적임자임을 굽히지 않았다. 만약 문소리가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면, 이 감독이 자신의 주장을 굽혔다면, 오늘의 문소리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를 일이다.

■‘한공주’로 공주 등극
문소리는 <박하사탕>으로 데뷔한 뒤에도 충무로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블랙컷> <외계의 제19호 계획> <봄산에> <상암동 월드컵> <승부> 등 단편영화에 출연하거나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맡았다. 교사자격증이 있는 문소리는 이와 함께 한 복지관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장애인들을 가르쳤다. 초등학생 대상 한자교실 수업도 맡았다. <오아시스>의 여주인공 ‘한공주’ 역을 맡게 된 것은 이와 관련이 깊다.

한공주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한국은 물론 외국의 경우도 유명 여배우가 이런 배역을 해낸 전례가 없다. 이창동 감독은 유명 여배우의 출연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점을 감안, 문소리에게 6mm 비디오 카메라를 주고 2주 동안 연습하면서 그 과정을 찍어오라고 했다.

문소리는 <나의 왼발> 등 장애인이 나오는 비디오는 빼놓지 않고 관람하고, 방문을 잠그고 연습을 거듭했다. 눈을 돌리면 팔과 입이 풀리고, 몸이 되면 감정이입이 안 돼 애를 먹었다. 2주 뒤 오디션장에서는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여 카메라의 플레이 버튼을 못 누르고 그만 눈물을 쏟았다. 그러고는 못 하겠다면서 카메라를 들고 도망치듯 영화사를 나와 버렸다.

이 감독은 이때 <오아시스>를 덮어야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여자로서, 여배우로서 문소리와 얘기를 나눠봐 달라고 오지혜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지혜는 신인에게 오디션 기회가 주어진 게 어딘데 거부하느냐고, 그런다고 자존심이 사느냐고 문소리를 나무랐다. 어설픈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던 문소리는 선배의 말에 자신이 부끄러웠고,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내놓았다. “해볼만 하다”는 오지혜의 말에 용기를 냈다.

문소리는 이후 2개월여 동안 연습에 몰두했다. 시나리오를 읽고 또 읽었고 휠체어를 타고 거리로 나가 장애체험도 했다. 이어 6개월의 촬영기간에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살았다. 한공주가 일종의 사회부적응자 ‘홍종두’(설경구)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과일 깎는 칼로 손목을 그어 자살하는 장면 등을 놓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남성 중심적인 시각이 녹아들지 않도록 제작진과 논의를 많이 했다. 이 감독의 주문에 응하느라 실신 지경에 이를 만큼, 촬영을 모두 마쳤을 때에는 골반이 약간 뒤틀려 교정이 필요할 정도로 혼신을 다했다.

■“우리가 좋은 영화 만들어보자”
<분노의 윤리학>(감독 박명랑). 21일 개봉되는 문소리의 최근 영화다. 미모의 여대생 살인사건의 전말을 그린 블랙코미디이다. 나쁜 놈, 잔인한 놈, 찌질한 놈, 비겁한 놈, 그리고 단호한 여자가 얽히면서 드러나는 살인사건의 전모와 인간의 각기 다른 본색을 다뤘다.

이 영화는 문소리를 비롯해 유명 배우·스태프가 제작을 이끈 국내 최초의 작품이다. <부러진 화살>(감독 정지영)이 모든 배우·스태프의 러닝개런티 수용에 힘입어 저예산으로 제작된 데 반해 <분노의 윤리학>은 문소리·이제훈·조진웅·김태훈·곽도원과 김우형(촬영)·조화성(미술)·김선민(편집) 등 배우와 스태프가 의기투합, 지분 참여 형식으로 함께 제작을 주도했다. 참여한 배우들은 자신의 배역도 시나리오를 읽은 뒤에 스스로 정했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시나리오가 있는데 제작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영화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재미있게 만들어 볼 방법이 없을는지….’

문소리가 지난해 초에 들은 말이다. 문소리는 호기심이 발동, 시나리오를 읽고 출연 의사를 밝혔다. 동료 배우·스태프들이 뜻을 함께하면서 국내 최초로 유명 배우·스태프가 제작을 주도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문소리는 “배역의 비중을 떠나 한 명의 관객으로서 보고 싶은 영화였다”며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도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함께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도 이렇게 독특하고 재미있는 영화가 한 편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배우들이 시나리오를 보고 역할을 골랐는데 신기하게도 주요 배우분들이 선택한 역할이 겹치지 않았고, 감독님 의견과 다르지 않았다”고 전했다.

문소리의 다음 영화는 <협상종결자>(감독 이승준)다. 남편의 정체를 모르는 비밀요원의 아내가 일급 첩보작전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박하사탕>과 <오아시스>에서 함께한 설경구 등과 호흡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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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44)는 <꽃잎> <처녀들의 저녁식사> 등을 거쳐 <박하사탕>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연기력은 물론 흥행성적도 돋보인다. 12월 현재 300만 명 이상이 관람한 한국영화 78편 중 그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 7편이다. 배우 가운데 가장 많다. 천만 영화 <해운대>와 <실미도>를 비롯해 <강철중: 공공의 적 1-1> <그놈 목소리> <공공의 적2> <광복절특사> <공공의 적> 등이다. <타워>에 이어 문소리 등과 <협상종결자> 촬영을 마쳤고 요즘 정우성·한효주 등과 <감시>를 찍고 있다. 

 

 

설경구는 <실미도>(감독 강우석·2003)에서 비운의 북파공작원으로, <해운대>(〃 윤제균·2009)에서 초대형 쓰나미에 휩쓸린 시민으로 출연해 온몸을 던졌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타워>(〃 김지훈)에서도 다르지 않다. 후배들에게 ‘전설’로 불리는 소방대장 역을 맡아 혼신을 다했다. 최악의 화재 현장에서 인명을 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리 판단에 능하고 과감한,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마침내 울먹이게 만드는 영웅상을 펼쳐냈다.


설경구는 이처럼 극중에서 온몸으로 고초를 겪는 인물과 인연이 깊다. 첫 영화 <꽃잎>(〃 장선우·1996), 첫 주연 영화 <송어>(〃 박종원·1999), 출세작 <박하사탕>(〃 이창동·1999), 그리고 <광복절특사>(〃 김상진·2002), <그놈 목소리>(〃 박진표·2007) 등에서, 그의 아바타라고 할 수 있는 ‘강철중’을 낳은 <공공의 적>(〃 강우석·2002) 시리즈 3편에서도 쓴맛 끝에 단맛을 보거나 끝내 보지 못하는 인물로 각광받았다.

 

■“연기도 해봐야”
설경구는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다. “감독 잘하려면 연기도 해봐야 한다”는 선배의 말에 따라 연극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배우가 됐다. 1학년 때 출연한 <만선>에서 전수경·유오성·박미선 등과 함께한 설경구는 공연이 끝난 뒤 한참을 울었다. 심혈을 기울인 뒤 밀려온 허탈감을 주체하지 못해…. 그런 그는 며칠 뒤 연출을 맡았던 4학년 여자 선배의 편지를 받았다. 연습·공연 과정, 그리고 울음 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영화보다 연극을 전공하라는 권유가 담긴 편지였다.

설경구는 이후 연극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자연스레 영화감독의 꿈을 접고 연극을 전공했다. 4학년 때에는 제1회 젊은 연극제 공연작 <달아 달아 밝은 달아>를 연출했고, 덕성여대 약대 연극반 공연작 <들소> 객원 연출을 맡기도 했고, 4학년 2학기 때부터 동숭동에서 활동했다. 극단 ‘한양 레파토리’에 입단, <심바새매>(‘심야에는 바바라, 새벽에는 매리와’. 원제 <라이어>)에 동성애자로 출연했다.

이후 대학을 졸업한 설경구는 신문보급소에서 삽지 작업을 하고, 시내 곳곳에 연극 포스터를 붙였다. 포스터 부착 작업을 한 작품 가운데 하나가 극단 ‘학전’의 <지하철 1호선>. 대학 선배인 학전 기획실장의 배려로 포스터 부착 작업을 하던 어느 날 설경구는 김민기 대표의 눈에 띄었다. 김 대표는 기획실장에게 설경구에 대해 묻고 그 자리에서 설경구를 <지하철 1호선>에 캐스팅했다.

설경구는 이 작품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1994년 초연 때부터 96년까지 참여했다. 80여 가지 배역 가운데 두 역을 빼고 다해보면서 다양한 경험과 연기력을 쌓았다. 김 대표는 이와 관련해 “어차피 길게 할 연기생활인데 ‘왕자병’에 걸리지 말라고 연기력이 필요한 삼류 역할을 많이 맡겼다”면서 “그런데 불평 안 하고 항상 성실하게 준비하고 연기를 잘했다”고 밝힌 바 있다.

                 <꽃잎>에서 설경구가 추상미·나창진·박철민(왼쪽부터)과 ‘소녀’(이정현)를 찾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10㎏ 정도 빼라”
첫 영화 <꽃잎>에는 장선우 감독에게 연출 수업을 받던 대학 동기, 훗날 <이대근 이댁은>(2006) <불후의 명작>(2000) 등을 연출한 심광진 감독의 추천에 힘입어 출연했다. 여주인공 ‘소녀’(이정현)의 행방을 쫓는 대학생 ‘우리들’ 역을 맡아 박철민·추상미·나창진 등과 함께했다.

이 영화 ‘쫑파티’ 때 설경구는 구원의 천사를 만났다. ‘호랑이 선생님’이던 고 유영길 촬영감독이다. 유 감독이 “경구야! 너 같은 얼굴이 배우를 하는 데 좋아. 평범하기 때문에 네가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얼굴이 나올 수 있어”라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한국 최고의 촬영감독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데에다 배우로서 장점을 지녔다면서 성장 가능성을 인정해 주자 설경구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설경구가 배우로 성장하는 데에는 <처녀들의 저녁식사>(감독 임상수·1998)가 밑거름이 됐다. 그는 호텔 직원 ‘연’(진희경)과 하룻밤을 보내는 만화가로 6분쯤 나왔다. 짧은 시간이지만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유령>(〃 민병천·1999) <송어>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전수일·1999) <박하사탕> 등에 잇따라 캐스팅되면서 ‘연기파’ 배우로 손꼽혔다.

임상수 감독은 <지하철 1호선>을 보고 설경구를 캐스팅했다. 설경구가 출연한 장면은 편집 작업 때 절반 정도가 잘릴 뻔했다. 여자 스크립터가 임상수 감독에게 자르면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해 6분쯤 나왔다. 스크립터가 자신의 주장을 굽혔다면 그의 출연 장면은 3분 정도에 그쳤고, 그랬다면 설경구는 주목받지 못했고, <송어>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박하사탕> 등과 인연을 맺지 못했을는지 모를 일이다.

임상수 감독의 조언도 큰 몫을 했다. 임 감독은 설경구에게 살을 뺄 것을 권했다. “10Kg 정도 빼면 아마 감독들이 엄청 찾을 것”이라면서. 설경구는 임 감독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새벽과 밤, 매일 두 차례씩 뛰면서 식사를 조절해 10Kg을 뺐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보고 설경구를 찾은 박종원·전수일·이창동 감독이 그를 몰라볼 정도로. 특히 박종원 감독은 오디션을 보러 온 설경구를 옆에 두고 “설경구는 안 왔었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연기 하지 마라”
<박하사탕>의 주인공 ‘김영호’는 원래 한석규였다. 이창동 감독이 <초록물고기> 때 일찌감치 거론, 한석규가 맡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나온 뒤 한석규가 고사해 설경구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설경구는 첫 오디션에서는 떨어졌다. 이후 TV드라마 <고백> 등의 작가인 이창동 감독 부인의 제안으로 다시 기회를 잡았다. 거실에서 우연히 본 오디션 필름에서 설경구를 보고 “김영호 여기 있네”라며 설경구를 추천한 것이다.

삼척에서 <송어>를 찍고 있던 설경구는 이 감독의 “함께 하자”는 말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한 뒤 바깥에서 담배를 엄청 피웠다. “내일 책 읽어보자”는 이 감독의 말에 설경구는 “하고는 싶지만 능력이… 자신이 없다”고 했다. 큰절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이후 10일이 지나도록 답을 안 했다. 자신 때문에 영화가 망가지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안 하면 후회할 것 같아 달려들기로 마음먹었다. 이 감독은 “다른 배우들과 달리 자신이 없다고 한 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면서 “평범한 마스크에 카리스마가 약해 보였지만 볼 때마다 얼굴이 달랐고, 그 점이 선악은 물론 다양한 색깔의 표현이 가능해 보여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박하사탕>은 1999년 4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 찍었다. 설경구는 IMF로 망한 사업가, 악질 형사,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계엄군, 순진한 공장 노동자 등 복잡다단한 40대에서 20대를 살아내느라 고역을 치렀다. 이 감독의 한결 같은 주문은 “연기를 하지 마라”였다. 설경구는 연기를 하면서 연기를 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스태프들이 무서워서 가까이 가는 걸 꺼려 할 정도로 배역에 몰입, 진짜 배우로 거듭났다.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으로 대종상·백상예술대상·이천춘사대상영화제·청룡영화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에서 7개의 신인남우·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설경구 시대’를 열었다.

 

                   <타워>에서 설경구는  후배들에게 ‘전설’로 불리는 소방대장 역을 맡아 혼신을 다했다. 최악의 화재 현장

                        에서 인명을 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리 판단에 능하고 과감한,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마침내

                        울먹이게 만드는 영웅상을 펼쳐냈다. 김상경·손예진·조민아·김성오(왼쪽부터)를 비롯해 김인권·도지환·안

                        성기·차인표·박철민·이한위·정인기·송재호·이주실·이창주·이창용·권현상 등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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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성(47)은 1980~90년대 연극배우 출신 영화배우 1세대로 손꼽힌다. 서울대 경영학과 84학번인 그는 1987년 극단 천지연을 필두로 한강·한양레파토리·연우무대·학전 등에서 활동했다.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1995)로 영화와 인연을 맺은 뒤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바리케이트> <억수탕> 등의 주연배우로 각광받았다. 이후 약 10년간 베트남에서 영화 수입·배급, TV드라마·연극 제작을 했다. 2010년 여름에 귀국, <북촌방향> <건축학개론> <남영동1985> <26년>에 출연했다. 요즘 송강호·이정재·백윤식·김혜수·조정석 등과 함께 <관상>을 찍고 있다.

 

 

■연극으로 사회 참여
김의성은 서울대 경영학과 2학년 때 연극과 인연을 맺었다. 교내 연극을 보고 뒤풀이에 따라 간 게 계기가 됐다. 김의성은 “이념 서클에 들어가고, 데모에 참여해 돌도 던졌지만 그보다 연극을 통해 발언을 하는 게 체질에 맞았다”며 “그게 지금 배우로 살아가는 운명의 출발점이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 실존 문제로 고민이 많았어요. 암울한 시대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했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연극만 하면서 살 수 있을지…. 결국 휴학을 했고, 친구가 있는 부산의 한 공장에 취직해 공원 생활을 했어요. 영장이 나와 입대했고.”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에는 1987년 대학 연극·탈춤반 출신으로 결성된 극단 천지연 활동에 주력했다. 졸업만 하면 어디든 취직이 가능한데 연극을 한다고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자 집안의 반대가 거셌다. 김의성은 극단에 불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라는 아버지와 형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연극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정진영과 함께 2인극 <동팔이의 꿈>을 전국의 공장·학교를 순회하며 1년 동안 공연하는 등 문화 운동에 앞장서고 파업 현장을 찾아 다녔다.

극단 한강 시절에는 밥만 먹어도 좋았다. 연우무대에서는 밥을 꼬박꼬박 사줘 더욱 좋았다. 학전에서는 계약까지 해줘 고마웠다. 하지만 수입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과외교사로 한 달에 20만~30만원을 벌어 생활했다.

“당시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 월급이 70만원인가 했으니 꽤 많이 번 거죠. 당시 작품으로 가장 큰 돈을 받은 건 TV드라마 <머나먼 쏭바강>이에요. 최하등급으로 계약한 뒤 재계약을 했는데 7개월에 1000만원 정도를 받았어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에서 김의성은 정선경·이경영·최진실 등과 호흡을 맞췄다.

 

김의성은 5년쯤 연극을 하던 시기에 이현승·여균동·김성수·이재용 감독들과 알고 지냈다. 그 인연으로 영화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감독 이현승)에서 비중있는 배역을 맡았다.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김동빈)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자>(〃 오병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홍상수) <바리케이트>(〃 윤인호) <억수탕>(〃 곽경택)의 주연배우로 각광받았다.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사회를 맡는 등 90년대 중후반 최고의 배우로 손꼽혔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김의성은 김진성·조은숙·이응경 등과 호흡을 맞췄다.

 

■영화로 시대 발언
‘강 과장’과 ‘최 계장’. 김의성이 영화 <남영동1985>(감독 정지영)와 <26년>(감독 조근현)에서 맡은 경관 역이다. 강 과장은 <남영동1985>에서 민주화운동가 ‘김종태’(박원상)를 취조하고 동료들과 함께 고문전문가 ‘이두한’(이경영)을 돕는다. 최 계장은 <26년>에서 전 대통령 ‘그 사람’(장광)을 응징하려는 ‘곽진배’(진구) 등의 계획에 맞선다.

김의성은 두 인물의 캐릭터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강 과장은 “평범한 사람, 피곤한 사람”이라고 했다. 최 계장에 대해서는 “노련한 사람, 안위에 민감한 사람”이라고 했다.

 

“강 과장에게 고문은 일의 하나에요. 그 일을 하면서도 프로야구에 관심이 많아요. 간혹 어깨·목을 주물러요. 고문·일과, 김종태 수사가 그저 빨리 끝났으면 하는 인물이에요. 최 계장에게 경호는 관할 서에서 하는 업무에요. 그 일에 능숙하죠. 일의 결과가 자신의 안위를 좌우하기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처리해요.”


 

김의성은 두 영화에서 각기 다른 경험을 했다. <남영동1985>에서는 두 차례 소름이 돋았다. 두꺼비 출현과 귀신(?)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양수리 세트에 두꺼비가 나타났어요. 인근 숲에서 세트장까지 먼 길을 걸어 온 거에요. 그런데 인재근 의원이 ‘민청련’의 상징이 두꺼비였다고 하더군요. 뱀에게 먹혀 자신이 지닌 독으로 뱀을 죽여 종족을 보호한다면서. 그분께서 잘하라고 와주신 게 아닌가 했어요.”

김종태를 심하게 고문하는 장면을 찍을 때에는 아무도 ‘커트’(cut)를 하지 않았는데 여자가 커트하는 소리가 들렸다. 녹음도 됐다. 현장에 여자가 없었는데. 김의성은 “두꺼비 출현보다 더 불가사의했다”며 “사고가 날 수 있었던 걸 미연에 방지해준 게 아닌가”라고 풀이했다.

 

<26년>은 어렵게 시작한 데 비해 현장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김의성은 “고소공포증이 있어 크레인에 올라가 ‘심미진’(한혜진)의 저격을 저지할 때 정말 무서웠다”고 했다. “혜진이가 오르내리기 귀찮다며 더 높은 곳에서 머물며 간식도 먹는 걸 봤기 때문에 꾹 참고 촬영했다”고 털어놨다. <26년>에 대해 “촬영 기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편집본이 두 가지”라며 “상영작은 줄거리 전개가 보다 매끄러운 것보다 각 장면마다 날 것의 감정을 살린 편집본”이라고 공개했다.

 

                     지난 11월 16일 열린 ‘서울광장 <26년> 콘서트 ’에서 <26년> 출연진이 사회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재미있게 살아라”
김의성은 <남영동1985>와 <26년>에서 문성근·이경영 등과 함께했다. 김의성은 “감회가 새로웠다”고 했다. “두 분 선배를 보면서 ‘나이 먹는 게 괜찮구나’ ‘배우로 늙는 것도 참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위안과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남영동1985>의 문성근은 영화 데뷔작 <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에서 만났다. 김의성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김원’ 역을 맡았고, 문성근은 CF감독 ‘김규환’으로 출연했다. 출판사가 경영난을 겪을 때 김원은 말도 없이 사라지고 광고회사에 카피라이터로 입사한 ‘이상민’(채시라)은 김원을 가슴에 묻어두고 김규환과 가까이 지낸다.


이경영은 <남영동1985>에 이어 <26년>에서도 함께했다. <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에 이어 주연을 맡은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에서 호흡을 맞춘 선배다. 두 번째 영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에서 김의성은 유부녀 ‘은재’(최진실)와 조심스런 만남을 갖는 유부남 ‘진우’(이경영)의 친구 ‘창세’ 역을 맡았다. 창세는 의부증이 있는 아내를 둔 인물로 애정 없는 남편에게 실망한 은재의 친구 ‘윤수’(정선경)와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이경영과는 인연이 남다르다. <네온~>에 앞서 출연한 드라마 <머나먼 쏭바강>에서도 함께했다. 이 드라마에서 김의성은 ‘황일천’ 병장(박중훈) ‘김기수 병장(이경영)’ 등이 소속한 1소대장 ‘이 중위’로 출연했다. 김의성은 원래는 병사였다. 첫 로케이션 때 촬영 준비가 덜 돼 한 장면도 못찍고 그냥 돌아왔고, 소대장 역을 맡은 배우가 아픈 바람에 대신 이 중위 역을 맡게 됐다.

 

 

요즘 출연작은 영화 <관상>이다. 이 영화에선 송강호 등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송강호는 김의성의 연우무대 후배이다.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김의성의 소개로 출연했다. 김의성은 “어느 날 술자리에서 강호가 대뜸 ‘이 형님이 나를 맨 처음 영화하게 해주신 분’이라고 했을 때 좀 쑥스러웠다”며 “예전과 다름없이 배우로 살아가는 선·후배들과 연기를 하는 나날이 즐겁다”고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부딪쳤던 실존 문제에 대한 고민이 30년이 지난 뒤에 완전히 풀렸다”고 했다. “연극을 한다고 노발대발하셨던 아버지가 임종 하루 전에 ‘재미있게 살아라’고 하셨다”며 “살아온 날의 삶이 녹아든 연기로 오랫동안 관객을 만나고 싶다”고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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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안석환(53)은 단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79년 대학 1학년 때부터 교내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했고 1987년 극단 연우무대의 <달라진 저승>으로 데뷔했다. 영화는 1992년 <명자 아끼꼬 쏘냐>로 인연을 맺은 뒤 1994년 <태백산맥> <너에게 나를 보낸다> 등을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7·1998년 동아연극상 연기상 등을 비롯해 2005년 KBS 연기대상 조연상을 받았다. 지난해와 올해 TV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와 <너라서 좋아> <패밀리>, 연극 <대머리 여가수>와 <웃음의 대학>, 영화 <후궁: 제왕의 첩>과 <26년>으로 기치를 높이고 있다.

 

 

“니가 헐라고 허는 일, 그거시 참말로 그 방법뿐인지…. 그거시 맞는 길인지, 솔직히 난 잘 모르겄다. 근디, 최소한 그런 거슬 생각조차 안 해보고 살았던 나는, 틀렸던 것 같아야.” “이태꺼정 암 생각 없이 금남로를 싸댕긴 거시… 인자와서 죄스럽네. 하… 아, 쪽팔리다 잉. 긍께… (웃음) 난 여그 들어와 있어도 싸다.”

영화 <26년>(감독 조근현)에서 화제를 낳고 있는 대사다. 영화 상영 중 이 대사가 나올 때 감탄하거나 고개를 숙이는 중년 관객들이 적지 않다. 최근 육상효 감독은 이 대사가 나오는 장면에서 “가장 울컥했다”고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이 대사는 ‘안수호’(안석환) 사장이 교도소로 면회를 온 ‘곽진배’(진구)에게 하는 말이다. 안수호는 광주 금남로를 주름잡는 조폭 두목으로 대형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곽진배는 안수호가 신뢰하는 수하이다. 곽진배는 사설 경호업체의 ‘김갑세’(이경영) 대표가 설계한 작전에 따라 저격수 ‘심미진’(한혜진), 정보원 ‘권정혁’(임슬옹), 브레인 ‘김주안’(배수빈) 등과 함께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군인들의 발포는 자위권 발동이었다고 주장하는 파렴치한 전 대통령 ‘그 사람’(장광)을 응징하는 데 앞장선다. 안수호의 대사는 이에 관한 것으로 그는 면회를 서둘러 마치면서 곽진배에게 “돌아보지 말고 앞만 봄서 냅다 뛰어”라고 한다.

“양아치인데 큰놈이에요. 대사가 좀 길었는데 조근현 감독, 진구와 함께 대본 연습을 하면서 짧게 정리했어요. 큰놈답게. 말이 많으면 잘아 보이잖아요. 구체적인 진배와의 관계, 지역 주민의 정서, 시대 상황은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게 좋고.”

 

 

안석환은 <26년>에 대해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영화”라며 “역사의 아픔과 교훈은 기록으로 남겨야 영원 불멸성을 지닌다”고 했다. “출연 제안을 받고 영화배우로서 고마움을 느꼈고, 출연·제작진과 고사를 지내면서 기뻤고, 진구·한혜진·임슬옹·배수빈… 시대의 아픔을 안으려는 젊은 배우들이 있다는 게 반갑고 뿌듯했고, 함께 기분 좋게 작업했다”고 털어놨다.

■기관원, 핑크 캐릭터로
안석환이 조폭의 두목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7년 8월 개봉작 <넘버 3>(감독 송능한)가 우선 손꼽힌다. <넘버 3>에서 안석환이 맡은 인물은 깡패 두목 ‘강도식’이다. 넘버 2를 다투는 ‘태주’(한석규)와 ‘재철’(박상면)을 카리스마로 쥐락펴락한다.

 

안석환은 “보스가 말이 많으면 보스답지 않다”면서 “눈빛만으로 말이 되도록 대사를 다 없애거나 줄였다”고 했다. 일례로 강도식이 수하들과 자리를 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의 경우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강도식이 손을 내밀면 담배가 손가락에 끼워지고, 담배를 입에 물면 불이 붙여지고, 탁자에 재떨이가 자동적으로 준비되도록 설정했다.

안석환이 영화배우로 눈길을 끌기 시작한 작품은 1994년 개봉작 <태백산맥>(감독 임권택)과 <너에게 나를 보낸다>(감독 장선우)이다. 9월 17일에 개봉된 <태백산맥>에는 빨치산 토벌에 나선 방첩대장 ‘전원장’으로, 10월 1일에 개봉된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는 기관원 ‘색안경’으로 출연했다. 전원장은 극우 마초이고, 색안경은 여자 같은 기관원이다. 두 영화가 잇달아 개봉된 뒤 관객은 물론 영화인들조차 전원장과 색안경으로 나온 배우가 한 사람인 줄 몰랐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는 안석환이 예명(안진형)을 써 더더욱 다른 배우인 줄 알았다.

“기관원=검은색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어요. 장정일 원작인 점을 감안해 색안경의 캐릭터 색깔을 핑크로 설정했죠. 감독님은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했는데 자꾸 말씀드리니까 일단 해보라고 하더군요. 새롭고 재밌으니까 통과된 거에요.”

 

안석환은 “가운을 입고 애드립도 했다”며 “여성적인 말투가 유행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했다. “그전에는 연봉이 400만원 정도에 불과했는데 두 영화를 하면서 1000만원을 넘어섰다”고 덧붙였다.

■술자리 소재·분위기 좋아서
안석환은 단국대 경영학과에 입학하면서 연극과 인연을 맺었다. ‘동아리 활동을 해라, 넓게 살아라’는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고른 게 극예술연구회였다. 안석환은 “한두 명이 각자 행동하는 다른 동아리들과 달리 극예술연구회는 여러 명이 빙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데 끌렸다”고 했다.

“입회 이후 수업이 끝나는 오후 5시부터 통금(자정) 전까지 거의 매일 술을 마셨어요. 1학년 신입생부터 제대하고 복학한 고참까지 한데 어울려서. 대화의 주소재가 인생과 예술에 대한 것이었죠. 처음에는 연극보다 그런 술자리가 더 좋았어요.”

등사판 밀어서 만든 대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연습하고, 망치질해서 무대 만들고, 조명기 닦아 달고, 여학생들은 무대 의상 만들고…. 안석환은 “굽은 못은 펴서 사용할 정도로 어려운 가운데 막은 올라갔고, 관객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눴고,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연극에 매료됐다”고 했다.

매년 정기공연 두 번, 워크숍 무대를 두 번 올렸다. 1981년에 입대, 제대 후 복학 전 1년 동안 학비를 벌기 위해 특수운송회사에 다녔다. 1985년 복학한 뒤에도 직장생활을 병행했다. 학생과 직장인으로 바빴고, 수입도 짭짤했지만 견딜 수 없었다. 연극을 하고 싶어서. 결국 1986년 10월에 직장을 그만두고 극단 연우무대에 들어갔다. 이듬해 졸업한 뒤에는 극단에서 살았다. 그해 가을, 연우무대의 <달라진 저승>(김광림 작·연출)으로 데뷔했다.

“데뷔 후 5년 내에 성공하지 못하면 아버지 장사를 잇기로 했어요. 장사하는 게 싫어서 기를 쓰고 연극을 했는데 신통치 않아 5년쯤 했을 때 상심이 컸죠. 그런데 그 즈음부터 출연 섭외가 줄을 잇더군요. 10년 전후로 상도 받으면서 인정을 받았고.”

1997년 <이세상 끝>, 1998년 <남자충동>으로 2년 연속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았다. 한국연극협회 최우수남자연기상과 우수공연상 연기상,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연기상, 세계연극제 연극인이 뽑은 인기배우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받았다. 동물 닮기, 자연으로 돌아가기에 기초한 ‘안석환식 인물 창조’로 각광받았다. 2005년에는 <별남별녀>와 <쾌걸 춘향>으로 KBS 연기대상 조연상도 받았다. 방송·영화에 출연하면서 꾸준히 연극을 하는 안석환은 지난해 <대머리 여가수> 각색·연출을 맡았고 <웃음의 대학>을 장기 공연했다. 안석환은 “가슴으로가 아니라 세포가 느낄 정도로 변신해야 한다”면서 “부단히 연구하고 연습해서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게 배우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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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수(47)는 CF모델을 거쳐 영화배우·탤런트로 각광받아 왔다. 영화 데뷔작은 이규형 감독의 <청 (블루 스케치)>(1986)다. 이후 <신의 아들>(1986) <난 깜짝 놀랄 짓을 할거야>(1990) <맨?>(1995) <소년, 천국에 가다>(2005) 등에 출연했다. <맨?> 이후 17년 만에 주연을 맡은 영화,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피에타>(감독 김기덕)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아시아태평양영화상(APSA) 심사위원대상, 대중문화예술상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친구 따라 갔다가
조민수는 연예인을 동경하지 않았다. 군의관이던 아버지가 전역 후 의술을 버리고 한 사업이 잘 안돼 경복여상에 진학한 조민수는 무용반 활동을 했다. 3학년 때 짝의 권유로 무용반을 그만두고 연극반에서 활동했다. 데뷔작 <장산곶매>에서 형사 역을 맡았다. 한 달 남짓한 연습 당시에는 지도교사의 칭찬을 한몸에 받았지만 정작 공연 때에는 대사를 잊어먹는 곤욕을 치렀다.

조민수의 꿈은 유치원 교사였다. 고3 때에도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취업을 해서 돈을 번 다음에 대학에 진학, 유아교육을 전공하려고 했다.

그런 그에게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다. 고3 막바지 어느 날, 한 친구가 생경한 제안을 했다. 언니가 다니는 삼성물산에서 학생 모델을 찾는다며 함께 가보자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호기심이 발동, 친구와 동행했다. 사진을 찍고 돌아왔고, 며칠 뒤 제일기획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삼성물산에서 찍은 사진을 봤다면서 한 번 보자는 전화였다. 다시 사진을 찍고 동영상 카메라 테스트도 받고 함께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출연할 수 없었다. 재학 중에는 활동할 수 없다는 학교 측 방침에 따라야 했다.

1983년 2월에 졸업한 졸업한 조민수는 카세트 ‘마이마이’ 광고를 필두로 본격 활동에 나섰다. 취업한 친구들 월급보다 모델료가 훨씬 많은 게 좋았다. 열심히 하면 대학 등록금은 물론 가계에도 도움을 줄 수 있어 신이 났다. 다소 이국적이고 참신한 마스크로 선풍을 일으키면서 3년여 활동하는 동안 300여 편의 지면광고와 CF를 찍었다.

 

CF모델의 꽃인 드봉 화장품 전속 모델로 활동하면서 운명의 여신을 만났다. 영화 <청 블루 스케치> 출연 요청을 받았다. 조민수는 영화배우로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CF모델로서 신선함이 떨어져 가는 걸 보완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출연 제의를 받아들였다. 영화 촬영이 늦어지는 동안에 제의 받은 KBS <TV문학관-불>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였다.

<불>에서는 15살에 시집 와 매일 밤 남편에게 시달리는 ‘순희’ 역을 맡았다. 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 기본적인 방송 용어도 모르는 조민수는 선배들에게 배운 대로, PD가 시키는 대로 연기했다. 시각장애인으로 출연한 <TV문학관-광화사>에서는 눈 먼 연기에 몰입하다가 다리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다. 대하드라마 <노다지>에선 무당 딸 역을 맡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마구 떨면 된다”는 선배의 가르침대로 신 내린 연기를 하던 중 “간질병 환자냐?”는 지적을 받았다. 일일극 <욕망의 문>에서는 재벌 총수의 아내 역을 맡아 20대에서 60대까지 변신했다. 60대 노역 분장을 하고 첫 대사를 할 때 “지금 학예회 하냐”는 핀잔을 들었다. 얼굴은 노파인데 음성은 20대 아가씨였던 것이다.

이대로 무너지느냐, 분연히 일어서느냐. 조민수는 이를 악물었다. CF를 마다하고 연습벌레가 됐다. 주어진 역에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이름에 책임을 지고 나아가 이름이 빛나도록 하는 데 만전을 기했다. <욕망의 문>(1987)과 빨치산으로 출연한 <지리산>(1989)을 통해 KBS 연기대상 우수연기상, <달빛가족>(1990)으로 백상연기대상 인기상을 받았다.

 

■연기 아닌 연기로
지난 9월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때 일이다. <피에타> 공식 시사회 후 조민수는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거명됐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민수는 마음을 비웠다. “여기까지 온 것으로, 후보자로 거론되는 데 만족하자”고 다짐했다. 그럼에도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이스라엘의 하다스 야론이 호명됐을 때 다소 아쉽기는 했지만  이내 온 마음으로 <피에타>의 황금사자상 수상을 기원했다. 바람대로 <피에타>가 최고의 상을 받자 누구보다 기뻤다. 시상식 후 ‘황금사자상 수상작은 다른 부문상을 받을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만장일치였던 여우주연상 수상에서 제외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아쉬움보다 <피에타>가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이른바 3대 국제영화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게 기뻤다.

지난달 23일 호주 브리스번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태평양영화상 시상식 때에는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기대가 컸던 여우주연상을 필리핀 여배우가 받자 조민수는 당황했다. 그리고 의당 받을 거라고 여긴 자신이 부끄러웠다. 돌아보는 시간을 주는 데 감사했다. 낙심한 기력이 역력한 동료들을 격려하며 최민식의 남우주연상 수상을 한껏 축하했다. 잠시 후 심사위원대상 수상자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걸 듣고 반전의 기쁨을 누렸다. 의심의 여지가 없던 <피에타>가 최우수작품상을 받지 못하자 자신의 심사위원대상 수상을 물리고 싶을 정도로 아쉬웠다.

<피에타>는 조민수가 <맨?>(감독 여균동) 이후 17년 만에 여주인공을 맡은 영화다. 조민수는 사채 때문에 자살한 아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이강도’(이정진)의 엄마를 자처한 여인 역을 맡았다. 생모임을 인정받으려고 이강도가 자신의 다리에서 떼낸 살을 씹어 삼키고, 모정을 느끼게 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쇼를 하고, 이강도가 보는 데에서 자살하고, 이강도로 하여금 자살로 지난 삶을 뉘우치게 만드는 인물을 인상 깊게 펼쳐냈다.

조민수는 출연에 앞서 김기덕 감독을 만나 그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읽고, 기획·연출 의도를 확인하고,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거친 표현의 수정·보완을 요구했다. 김 감독은 예닐곱 번 시나리오를 수정했고, 조민수는 6회 만에 끝난 자신의 분량 촬영에 온몸을 던졌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아시아태평양영화상(APSA) 심사위원대상, 그리고 대중문화예술상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영화 데뷔작 <청>은 원래 제목이 <블루 스케치>였다. 외래어라는 이유로 반려돼 <청>으로 소개됐다. <맨?>은 원래 <포르노 맨>이었다.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반려, <맨?>이 됐다. 조민수는 강제로 제목을 바꾸게 하는 관계 기관의 검열에 화가 났다. <청>에서는 작가를 꿈꾸는 여대생 ‘유미’ 역을 맡아 야구부 특기생 ‘지훈’(천호진)과 키스신도 찍었다. 첫 키스를 실제 연인이 아닌 배우와 하는 게 내키지 않아 6번이나 NG를 냈다. 결국 ‘포르노 걸’로 전락하는 ‘미아’ 역을 맡은 <맨?>에서는 베드신이 있으면 무조건 거절했던 예전과 달리 노출을 기피하지 않았다.

조민수가 생각하는 배우는 ‘혼의 조련사’다. 조민수는 혼을 조련할 때 깊고 넓은 사실성을 우선하고 ‘연기 아닌 연기’를 중시한다.  유쾌하지 않은 경험 등으로 인해 영화보다 TV드라마를 선호했던 조민수는 이제부터 다시 달릴 참이다. <피에타>는 그 신호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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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감독 2012.12.11 07: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민수 선생님.피아타 잘 봤습니다.영화 줄거리와 완성도 좋았지만 여배우의 가라앉은 연기력과 반전을 엿보이지 않는 집중도에 정말 놀랐습니다.놀랐습니다.지리산 쫑파티로 리버사이드호텔 나이트에서 옆에서 잠간 뵐때 첨 뵜는데 이렇게 세상을 깜짝 놀라게 나타나시다니.당신은 한국 영화계를 빛낸 여배우 입니다.사랑합니다.전 애인 있어요.ㅋㅋㅋ^^

  2. 랑선 2012.12.12 22: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분후에..영화를 봅니다..바로 글 올리겠습니다... ^^

정재영(42)은 연극배우로 데뷔, 영화배우로 각광받고 있다. <박봉곤 가출사건>(1996)의 단역으로 영화에 입문, <킬러들의 수다>(2001) 등을 거쳐 <아는 여자>(2004)부터 주연배우로 자리잡았다. <실미도>(2003)로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웰컴 투 동막골>(2005)과 <나의 결혼원정기>(2005)로 디렉터스 컷 올해의 남자연기상, <바르게 살자>(2007)로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남자배우상, <김씨 표류기>(2009)로 황금촬영상 남우주연상, <이끼>(2010)로 청룡영화상·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요즘 <내가 살인범이다>로 주목받고 있으며 최근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제목 미정) 촬영을 마쳤다. 다음 작품은 <AM 11:00> <방황하는 칼날> 등이다.


 

 
■‘지현’에서 ‘재영’으로
<내가 살인범이다>의 주인공 ‘최형구’는 한국영화에서 전례가 없는 형사다. 깡패 같은 형사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략적인 형사다. 그 지략이 상상을 초월한다. 공소시효가 끝나가는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을 구사한다.

 

지난달 <내가 살인범이다> 제작보고회와 기자시사회를 마친 뒤에 각본·연출을 맡은 정병길 감독은 최형구 역에 정재영을 놓고 썼다고, 캐스팅에 성공한 뒤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실제로 <내가 살인범이다>에서 정재영은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송강호), <공공의 적>의 ‘강철중’(설경구), <거북이 달린다>의 ‘조필성’(김윤석) 등을 아우르는 형사 캐릭터로 스크린을 감칠맛 나게 수놓았다.

 

<내가 살인범이다>는 정재영의 30번째 장편 영화다. 최형구는 그의 배우 인생에서 특별한 인물이다. 데뷔 이래 처음으로 맡은 본격 형사다. <이끼>에서 젊었을 때 잠시 형사였던 인물로, <바르게 살자>에서 은행강도를 가장한 순경이었던 그는 선량한 역보다 불량한 역을 많이 했다.

 

데뷔도 나쁜 남자로 했다. 1996년 <박봉곤 가출사건>(감독 김태균)에 ‘불량배’로 출연했다. ‘박봉곤’(심혜진)에게 기웃거리는 동네 건달이다. 1996년 <산부인과>(감독 박철수)에 의사 ‘정연’(황신혜)의 환자 남편, 1997년 <초록물고기>(감독 이창동)에 가수 ‘미애’(심혜진)가 출연하는 카바레에 술에 취한 ‘손님’으로 등장했다.

<박봉곤 가출사건>에는 황규덕 감독의 소개로 출연했다. 황 감독은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1990)에서 만났다. 이 영화에는 고교시절 연극반 지도교사의 소개로 출연했다. 엔드 크레디트에 ‘청소년 연기자’로 나온다. 본명(정지현)으로. <초록물고기>는 촬영 하루 전 날 연락을 받았다. 현장에서 본인이 나오는 장면만 기록된 이른바 ‘쪽대본’을 받았다. 정재영은 “옆모습만 조금 나온다”면서 “<박봉곤 가출사건> <산부인과> 때와 마찬가지로 카메라에 주인공이랑 함께 잡혀 잘리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박봉곤 가출사건>의 정재영(가운데). 박봉곤(심혜진)에게 추근대는 동네 불량배로 나왔다.

 

<초록물고기> 이후 1998년 <기막힌 사내들>(감독 장진)과 <조용한 가족>(감독 김지운), 1999년 <간첩 리철진>(감독 장진), 2000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감독 류승완), <극단적 하루>(감독 장진), <공포택시>(감독 허승준) 등에 출연했다. <기막힌 사내들>에 ‘낯익은 기사’, <조용한 가족>에 ‘제비’, <간첩 리철진>에 ‘잔머리 택시강도’, 우정 출연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는 ‘성빈’(박성빈)의 형으로 등장했다.

 


정재영은 “당시에 오디션을 본 작품이 20편쯤 되는 것 같다”며 “한 편도 붙은 게 없다”고 털어놨다. “<삼인조>(감독 박찬욱)의 경우 ‘연기는 좋은데 이미지가 평범하다. 단역은 개성있게 생겨야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하도 떨어져 오디션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다”고 덧붙였다.


 

예명(정재영)은 <극단적 하루>부터 사용했다. <극단적 하루>에서는 청부 살인자의 매니저를 맡았다. 의뢰인들에게 ‘사다리 타기’로 살해 방법을 고르게 하는 인물이다. <공포택시>에는 여러 택시 기사 가운데 ‘논스탑’으로 출연했다. 정재영은 예명에 대해 “장모님이 사위 하는 일이 잘 되라는 바람을 담아 스님에게서 받아온 이름”이라고 했다. 2001년 신현준·신하균·원빈과 함께 공동주연을 맡은 <킬러들의 수다>(감독 장진)에 정재영은 사격의 불사신 ‘재영’으로 출연했다.

 

■“왜 이렇게 운이 없지?”
정재영은 고교시절 운동을 좋아했다. 3년 내내 복싱을 했고 야구·농구·축구 등 모든 운동을 좋아했다. 기자나 방송 프로듀서를 꿈꿨다. “선생님의 꼬임에 넘어가 연극반에서 활동했다”는 정재영은 처음으로 출연한 <봄날>로 동랑청소년연극제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는 등 연기력을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1992년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 황정민·류승룡·임원희·신동엽·안재욱·최성국·최덕문 등과 함께 수학했다. 한 해 선배가 장진 감독. 졸업 후 장진 감독의 ‘문화창작집단 수다’에서 활동, 연극 <허탕> <박수칠 때 떠나라> <매직타임> 등에 출연했다. 안내상·이문식 등과 함께 <라이어> 초연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다.

 

정재영은 연극을 하면서 충무로를 잇따라 두드렸지만 외면받기 일쑤였다. 정재영은 당시 조급했고 ‘왜 이렇게 운이 없지?’라고 불평도 많이 했다. 정재영은 “어느날 어머니가 ‘운이라는 것은 길을 열심히 가다보면 저절로 와서 탁 붙는 거다’라고 한 말이 가슴에 확 와닿았다”며 “그때부터 조급해 하지 않았다”고 했다.

영화 오디션마다 떨어져 빈둥거리던 20대 중반, 그는 자작 모노드라마를 즐겨 찍었다. 비디오카메라를 구입해 방 안 맞은 편에 켜놓곤 혼자서 연기수업을 했다. 한 캐릭터로 연기를 하다가 카메라 밖으로 숨고, 다른 캐릭터로 들어와 마구 주절거리고는 했다. 그 테이프 분량이 엄청났다. 정재영은 “결혼하기 전에 완전 폐기했다”며 “애드립은 그때 꽤 연구한 것 같다”고 기억했다. “내가 아는 한 정재영은 리액션이 최고로 좋은 배우”(감독 장진)라고 했듯 그의 장기로 손꼽히는 리액션도 그때 연마했다.


 

 

정재영의 출세작은 <아는 여자>(2004)다. 오진으로 암 선고를 받은 야구선수 ‘동치성’으로 출연해 이나영 등과 호흡을 맞췄다. <거룩한 계보>(2006)에도 호남 지방을 주름 잡는 조폭 ‘동치성’으로 등장, 정준호·류승룡 등과 함께했다. 정재영은 “<웰컴 투 동막골>에서도 이름이 처음에는 ‘동치성’이었다”며 “장 감독에게 바꿔달라고 해 ‘리수화’가 됐다”고 밝혔다.

정재영은 5년여 단역 생활을 거쳐 스타덤에 올랐다. 정재영은 “아내에게 서른다섯 살까지 해보고 안되면 포기하겠다 했다”면서 “하지만 실제로 그만 둘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주변에서 조금씩 배우로 보기 시작하는, 배우로 인정하는 것 같은 시선을 느낄 때 희망을 봤다”고 했다. “예전에는 ‘한 작품이라도 더 해야 되는데’ 였다면 지금은 ‘더 후퇴하면 안 되는데’로 고민이 바뀌었다”고 했다. “어떤 일이든 하다 보면 질리게 마련인데 ‘내가 처음에 이 일을 왜 했는지’를 떠올리고 ‘이게 나의 운명’이라는 마음으로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실미도>(1108만1000명) <웰컴 투 동막골>(800만8622명) <강철중 : 공공의 적 1-1>(430만670명) <신기전>(372만6134명) <이끼>(335만3897명) <킬러들의 수다>(225만4206명) <바르게 살자>(219만250명)…. 정재영의 흥행작이다. <내가 살인범이다>는 지난 8일 개봉, 26일 현재 215만8431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이 관람,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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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32)은 1996년 여고 1학년일 때 영화 <꽃잎>(감독 장선우)으로 데뷔했다. 영화 <마리아와 여인숙> <루트7> <침향> <하피> 등에 출연했고 국내외에서 가수로 더 각광받았다.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에서 금곰상을 받은 <파란만장>(감독 박찬욱·박찬경)을 선보인 데 이어 오는 22일 개봉되는 <범죄소년>(감독 강이관)에서 이른바 ‘문제적 엄마’로 열연을 펼쳤다.

 


■ <꽃잎>, 그리고 <범죄소년>
1980년 2월 7일에 태어난 이정현은 숫자 16과 인연이 깊다. <꽃잎>은 16살에 출연한 데뷔작이다. 이정현이 태어난 해, 16년 전 5월에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뤘다. <범죄소년>은 <꽃잎>이 개봉된 지 16년 만에 선보이는 새 영화다. ‘효승’(이정현)은 ‘범죄소년’(14세 이상, 19세 미만의 소년범)이 된 아들을 16살에 가졌다.

비정상인 소녀, 엄마 같지 않은 엄마. 이정현이 <꽃잎>과 <범죄소년>에서 맡은 인물이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때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친 충격과 죄책감으로 정상에서 벗어난 소녀는 30대 공사장 인부 ‘장’(문성근)을 무작정 따라가 동거한다. 여고생 때 덜컥 임신, 아들을 낳은 효승은 13년 만에 소년원에서 처음으로 대면한 아들(서영주)과 새 삶을 영위한다. 두 삶 모두 순탄하지 않다.

<꽃잎>은 격변기를 맞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삶을 조명했다. <범죄소년>은 ‘범죄소년’과 미혼모의 팍팍한 삶을 풀어냈다. <꽃잎>은 서울에서 21만3979명이 관람, <투캅스2> <은행나무침대>에 이어 1996년 한국영화 흥행 3위를 차지했다. 이정현은 대종상·청룡영화상·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제작한 <범죄소년>은 부산·토론토·도쿄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받았다. 도쿄에서 심사위원특별상과 최우수남우연기상을 받았다.

 

이정현은 <꽃잎>에 무려 3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발탁됐다. 마지막 3차 관문에서 펑펑 우는 연기를 해 여주인공을 따냈다. 이정현은 신문에 실린 여주인공 공모기사를 읽은 한 선생님의 권유로 응모했다. 수학여행 장기자랑 시간에 이정현이 서태지의 ‘교실이데아’와 룰라의 ‘비밀은 없어’ ‘프로와 아마추어’ 등을 춤추면서 열창, 친구들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게 추천받은 계기가 됐다.

당시 이정현은 친구들 사이에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선물과 편지를 보내는 친구들이 잇따랐고, 팬클럽까지 결성됐다. TV 드라마는 물론 잡지·CF 등에도 출연한 경험이 없는 생짜 신인으로 소녀 역을 소화, <꽃잎>이 개봉된 뒤에는 ‘연기 천재 소녀’로 손꼽혔다.

<범죄소년>은 제안을 받았다. 이정현은 배역이 엄마라는 데 의아했다. ‘내가 벌써 엄마를?’ 이 의문은 시나리오를 읽은 뒤에 풀렸다. 엄마처럼 보이지 않는 엄마였다. 또래를 임신시킨, 소년원을 들락거리는 범죄소년과 이 소년을 여고생 때 낳은 미혼모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작품성은 마음에 와닿았다. 그러나 공포영화 <하피>(2000) 이후 처음으로 하는 장편 영화에서 미혼모를 맡는 게 내키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읽은 지 사흘쯤 뒤에 전화를 해 하지 않겠다고 했다.

강이관 감독은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자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이정현은 강 감독을 만나기 전에 그의 데뷔작, 문소리·김태우·이선균 주연 <사과>(2008)를 봤다. 강 감독의 연출력에 믿음을 가진 뒤에 만나 대화를 나눈 끝에 출연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범죄소년>의 기획·제작 의도에 공감, 출연료를 받지 않고(재능 기부) 참여했다. 한 차례 중국 공연 외 해외의 모든 콘서트를 취소하거나 미뤘다. <범죄소년>에만 전념했다. “이정현의 재발견”(감독 이현승) “폭발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 연기가 놀랍다. 영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어머니상”(토론토국제영화제) 등의 찬사를 받았다. 

■ 비정상 소녀, 문제적 엄마
5자매의 막내로 태어난 초등학생 때 기계체조·발레·한국무용을 익혔다. 중학생 때에는 배우가 되려고 했다. 갖가지 남의 인생을 펼쳐내는 게 재미있고 폭넓은 인간 관계와 사회 생활로 풍성하고 값진 삶을 누리고 싶었다.

뤽 베송 감독의 <레옹>(1994)을 즐겨 봤다. ‘레옹’(장 르노)과 ‘마틸다’(나탈리 포트먼)의 순수한 사랑이 감동적이었고, 마틸다가 레옹 앞에서 갖가지 옷을 입고 노래하며 춤추는 장면이 좋아 종종 따라하고는 했다.

 

<꽃잎>에는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있다. 소녀는 김추자의 ‘꽃잎’을 즐겨 부른다. 이정현은 이를 위해 공연 장면이 담긴 테이프를 구해 김추자의 춤과 노래를 연습했다. 소녀가 술에 취해 등장하는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술을 마시고 취한 상황을 반복 연습한 뒤에 촬영에 응했다.

광주 일원에서 방황하던 소녀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장면을 찍을 때에는 제작진에게 수영을 못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역을 쓰지 않고 직접 웅덩이로 뛰어들었다. 소녀가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려고 바둥거리는 모습은 제작진의 기대 이상이었다. 장 감독은 흡족한 표정으로 ‘오케이’(O.K.)를 외쳤다. 그런데 이정현은 멈추지 않았다. 뒤늦게 실제 상황임을 깨달은 제작진이 뛰어든 덕분에 구조되었다.

<꽃잎>에서 이정현은 전라 노출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정현은 당시 “영화는 예술이고 그 예술의 한 장면이니까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배우로서 당연하다”고 했다.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가 아닌 만큼 작품이 필요로 하는 대로 연기하는 게 배우로서의 의무”라고 했다.

<범죄소년> 촬영 전에는 미혼모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많이 봤다. 시나리오를 되풀이해 읽으면서 어떤 미혼모를 보여줄는지를 고심했다. 어두운 인물로 나오면 그간 수없이 봐온 캐릭터여서 식상해 보일 것 같고, 뻔한 이야기로 치부될 것 같아 달리 설정하고 그 범주 안에서 변화를 꾀했다.

13년 만에 소년원에 있는 아들을 처음으로 대면하는 장면의 경우 아들에게 애절하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부여 안고 통곡하지도 않고, 조심스레 진짜 자기 아들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경제적 기반이 전혀 없어 주변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마음 속은 첩첩산중인데 표정은 밝고 애교가 넘치는 걸로 펼쳐냈다. 훗날 아들에게 출산 연유를 밝힐 때에는 남 이야기하듯 털어놓으면서 눈가에 얼핏 눈물이 맺히는 걸로 했다. 미혼모와 범죄소년에게 따뜻한 관심과 배려심을 갖게 했다.

이 과정에 밤샘 촬영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들과 나이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여야 하고, 세파에 시달린 지난 삶 등을 고려해 눈 밑에 다크서클을 그려넣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랜만의 영화여서 예쁘게 나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미련 없이 포기했다.

“예전에 비해 영화제작 방식이 체계적으로 바뀌고, 현장에서 곧바로 1차 편집을 하는 등 기술 발전도 놀라웠어요. 현장으로 밥차가 와 식사 때마다 식당을 찾아 이동하지 않아도 되고. 그런데 밤샘 촬영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어요. 예전에도 몸살을 앓거나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는데 이번 촬영(지난 12월 중순~1월 말)에도 거뜬히 해냈어요.”

이정현은 당분간 배우 활동에 전념할 계획이다. <범죄소년> 이후에 출연할 영화도 확정됐다. 조만간 공식 발표될 이 작품에서는 두 연기파 남자 배우와 호흡을 맞춘다. 한류스타로 손꼽히는 가수에 이어 한국영화가 새계로 뻗어나가는데 배우로서 일조하고 싶다는 이정현의 비상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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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60)가 7일 열린 제3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 시상식에서 <부러진 화살>로 남우연기상을 받았다. 그의 영평상 남우연기상 수상은 <오염된 자식들>(3회·1983년) <안개마을>(4회) <투캅스>(14회) <영원한 제국>(15회) <축제>(16회) <라디오스타>(26회)에 이어 이번이 일곱 번째다. 영평상 전 부문에 걸쳐 역대 최다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그는 국내에서 남우주연상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이다. 백상예술대상(여덟 번)·영평상(일곱 번)·대종상(다섯 번)·청룡영화상(두 번)을 비롯해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두 번, 이천춘사대상영화제에서 한 번 등 모두 스물다섯 번을 받았다.


 

 

■ “배우는 무슨…. 다시 배우하자”
안성기는 이름과 직업 앞에 ‘국민’이란 칭호를 받은 최초의 주인공이다. 1995년 영화전문지 씨네21에서 ‘국민배우’로 칭한 이후 만인의 공감을 얻고 있다.

 

안성기는 두 번의 데뷔를 했다. 1957년 다섯 살 때 <황혼열차>(감독 김기영)로 데뷔했고, 1965년 <얄개전>(감독 정승문)을 마지막으로 충무로를 떠난 뒤 1977년 <병사와 아가씨들>(감독 김기)로 다시 데뷔했다.

 

1976년 ROTC 출신 장교로 제대한 안성기의 꿈은 배우가 아니었다. 충무로 컴백은 안중에 없었다. 전공(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을 살려 대기업 문을 두드렸는데 번번이 분루를 삼켜야 했다. 종전(終戰) 이후 베트남과 국교가 단절돼있어 베트남어 전공자를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이다.

 

안성기는 부득불 진로를 변경했다. 군대에서 적금을 부어 모은 돈으로 중앙대 대학원 연극영화과에 입학, 영화이론을 공부했다. 그런데 학부에서 영화를 전공한 동기들을 따라가는 게 벅찼다. 결국 한 학기만에 그만두고 진로를 수정했다. 놀았던 물에서 다시 놀자고, 다시 배우가 되자고 마음먹었다.

영화연구가 정종화씨에 따르면 아역 출연작은 70여 편이다. 1959년 제4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10대의 반항>(감독 김기영)으로 소년특별연기상을 받는 등 ‘아역스타’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성인 안성기를 찾는 영화는 없었다. ‘아역배우는 성인배우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충무로의 통설에 시달렸다. 성공을 하려면 출연부터 해야 하는데 아역스타로서의 명성은 과거사에 불과했다.

 

백수로 지내던 그는 철칙을 세우고 이에 따라 생활했다. 아침에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 새로 구입한 자전거를 탔다. 몸매를 만들기 위해 보디빌딩을 했고, 스파르타식 강의로 유명한 한 영어학원에도 다녔다. 1주일에 두세 번은 프랑스문화원을 찾아 영화의 세계를 만끽했다. 밤에는 두문불출한 채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다. <누마>(누나와 엄마의 이미지를 혼합한 말), <흑점> 등 세 편을 완성했다.

 

■ “배우의 길도 내 몫이 아닌가….”
<병사와 아가씨들>은 경비초소 군인들과 고속버스 안내양을 주인공으로 한 멜로드라마다. 안성기는 성격이 밝은 병사 역을 맡아 이동진·이영옥·김경애·나기수 등과 호흡을 맞췄다.

그런데 이 영화는 빛을 보지 못했다. 한국영화연감에 서울 개봉관 상영기록이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상영시간(러닝타임)은 100분, 관람등급은 ‘연소자가’, 관람 인원은 0명으로 기록돼 있다. 반면 문화공보부 선정 1977년 하반기 우수영화 16편 가운데 하나로 뽑혀(경향신문 1978년 5월 20일) 제작사는 외국영화 수입쿼터를 받았다.

 

12년 만의 복귀작이 극장에 간판도 내걸지 못하는 걸 지켜봐야 하는 참담함이란…. 그런 데에다 불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78년작 <제3공작>(감독 설태호), 1979년작 <야시>(감독 박남수)와 <우요일>(감독 박남수)에서도 그는 빛을 보지 못했다.

 

<제3공작>은 6·25를 다룬 전쟁영화다. 안성기는 특공대 막내로 출연, 황해·이대엽·장혁 등과 함께했다. <야시(夜市)>와 <우요일(雨曜日)>은 한 여성이 치르는 사랑의 행로를 그렸다. 안성기는 장미희·김추련·윤일봉이 주연을 맡은 <야시>에 비운의 아이스하키 선수로, 정윤희·윤일봉·전양자 주연 <우요일>에는 중년 남자와 사귀는 연인에게 결별을 선언하는 수영 선수로 출연했다. <야시>는 1979년 2월 23일 단성사에서 개봉, 10만1083명이 관람했다. 1979년 4월 19일부터 대전 신도극장에서 상영된 <제3공작>은 2100명이 관람하는데 그쳤다. <우요일>은 1980년 4월 17일 단성사에서 개봉돼 2만4497명이 관람했다.

안성기는 연기만큼은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봐주지 않는다는 데 절망했다.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배우의 길도 자신의 몫이 아닌가보다라는 생각이 들 때면 눈앞이 캄캄했다. 어린시절에 받은 뜨거웠던 박수갈채는 커녕 배우로 인정해주는 눈길과 손길이 그리웠다. 부글부글 끓다 못해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다독이며 촬영장을 쫓아다녔다.

 

■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하냐?”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 안성기는 배우의 문을 다시 두드린 지 4년 만에 배창호 감독을 만나면서 재기의 기회를 잡았다. 이 과정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

 

배창호 감독은 아역 안성기의 팬이었다. <바람불어 좋은 날>(감독 이장호)에서 조감독을 맡은 그는 중국집 배달부 ‘덕배’ 역에 안성기를 추천했다. 덕배는 약간 사팔뜨기인 한 배우가 맡았는데 이 감독은 그의 연기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감독은 새 인물을 찾았고, 유명 코미디언과 성우가 물망에 올라 있었다. 안성기는 제외됐다. 이 감독은 사시에 말더듬이인 덕배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진 안성기는 이 감독을 쫓아다니며 간청했다. 이 과정에 백수 시절에 쓴 시나리오도 내밀었다. 이 가운데 윤흥인씨 소설 <기억속의 들꽃>과 천승세씨 단편 <눈꽃>을 혼합해 써놓은 작품이 이 감독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덕배 역에 발탁됐다.

그러나 세상을 거머쥔 듯한 기쁨도 잠시 안성기는 고행 길을 걸어야 했다. 여간 깐깐하지 않은 데에다 성격이 괄괄한 이 감독이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하냐”면서 퍼붓는 독설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철가방을 든 채로 스태프 몰래 눈물을 훔치고는 했다. “잘할 때까지 계속해”라는 말에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을 발이 부르트도록 거듭하고는 했다.


 

 

안성기는 자괴감에 잠을 못 이뤘다. ‘배우가 연기를 못한다, 더구나 아역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배우가…. 이렇게 창피할 수가….’ 절로 눈물이 나왔다. 밤마다 촬영한 장면을 복기하고, 촬영할 장면의 수읽기를 했다. 부단한 노력과 주변의 독려에 힘입어 덕배가 됐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고도성장에 따른 사회적 모순을 그렸다. 제19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남자신인상 등을 받은 데 이어 흥행에도 성공했다. 1980년 11월 27일 명보극장에서 개봉, 10만228명이 관람했다. <느미> <미워도 다시 한번 ’80> <평양맨발> 등에 이어 흥행 4위를 차지했다. 남자신인상을 받아 일약 스타덤에 오른 안성기는 1981년 <만다라>(감독 임권택)에서 ‘법운’ 스님으로 열연, 제1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연기상을 차지했다. 이후 30여 년간 관객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국민배우’로 사회봉사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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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연(41)은 하이틴 스타로 출발, 성인 연기자로 거듭난 대표적인 배우다. 데뷔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로 백상예술대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연기상을 받은 뒤 <눈꽃>(1993) <내 마음의 풍금>(1998) <여고괴담>(1999) <물고기자리>(2000) <중독>(2003) <태풍>(2006) <어깨 너머의 연인>(2008) 등에서 뭇 여성의 각기 다른 삶을 밀도 있게 소화, 각종 영화상 조연여우상·여우주연상과 심사위원특별상·인기상을 10여 차례 받았다. 요즘은 소지섭 등과 함께한 <회사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랑이 꽃피는 인물과 영화를….
한때 촉망받는 가수였지만 고난한 역정을 거치면서 미싱사로 일하는 여인, 아이 둘을 둔 엄마. <회사원>(감독 임상윤)에서 이미연이 맡은 ‘유미연’의 캐릭터다. 유미연은 생활이 고단하고 힘들지만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다. 아들(김동준)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살인 청부회사의 능력있는 사원 ‘지형도’(소지섭)로 하여금 가족의 소중함과 따뜻함을 처음으로 느끼게 한다. 킬러 생활을 청산하고 평범한 인생을 꿈꾸게 만든다.

임상윤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연의 팬이었다. 각본 작업할 때 이미연을 염두에 뒀다. 극중 이름도 유미연으로 했다. 이미연에게 출연 제의를 하면서 유미연 역이 지명도에 비해 비중이 떨어지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유미연이 매우 중요한 인물인 만큼, 연기와 외모로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는 이미연을 반드시 캐스팅하고 싶었다. 고사하는 이미연을 만나고 또 만나 합류를 끌어냈다.

 

이미연은 <어깨 너머의 연인> 이후 감정 기복이 심한 인물보다 따뜻하고 행복한 느낌을 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러느라 무려 5년이나 영화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유미연은 이성적으로 뿌리치지만 감성적으로는 끌리는 인물이었다. 삶이 고달프지만 희망과 사랑을 잃지 않는 캐릭터가 마음에 와닿았다. 끈질기게 러브콜을 보내는 임 감독의 진정성을 확인, 영화 복귀작으로 선택했다.

집안 부유하고 공부 잘하고 얼굴도 예쁜,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여고생. 항상 좋은 성적을 유지하면서도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감독 강우석)의 ‘이은주’이다. 이미연이 맡았던 인물이다. 이은주는 성적은 밑바닥이지만 밝고 순수한 ‘봉구’(허석)에게 끌린다. 그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다음 시험에서 7등을 한다. 부모의 차가운 눈초리를 견뎌내지 못하고 급기야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투신한다.

이미연은 여고 1학년 때인 1987년 미스롯데 선발대회로 데뷔했다. 당시 미스롯데 선발대회는 연예계 최고의  등용문이었다. 폐지되었다가 부활된 이 대회에 엄마와 언니의 권유로 출전, 1등을 차지한 이미연은 이내 CF모델로 각광받았다. 청순한 외모와 이미지, 해맑은 함박웃음을 담은 사진을 코팅한 ‘책받침 스타’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롯데제과 CF는 모두 다 했을 정도였고, 고3 때 출연한 가나초콜릿 CF는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런 가운데 이미연은 CF에 지쳐갔다.

이미연은 연기로 돌파구를 찾았다. KBS 가족드라마 <사랑의 기쁨>에 이어 청소년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에 출연하면서 생기를 되찾았다. 한 회에 특별출연하는 인물로 캐스팅된 뒤 호응을 얻으면서 최수종·박은영과 함께 주인공으로 고정 출연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출연은 이 드라마가 계기가 됐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시나리오를 쓴 김성홍 감독(훗날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 1·2편 시나리오를 썼고 <손톱>(1994) <올가미>(1997) <신장개업>(1999) <세이 예스>(2001) <실종>(2009) 등의 각본·연출을 맡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서 소개된 김창완 주연 <닥터>를 쓰고 연출도 함)이 <사랑이 꽃피는 나무>의 이미연을 보고 강우석 감독과 영화제작사 황기성사단의 이춘연 상무(현 씨네2000 대표, 영화인회의 이사장)에게 추천, 여주인공을 맡게 된 것이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더라도….
이미연은 그간 받은 시나리오와 달리 <행복은~>은 마음에 들었다. 방송국으로 찾아온 강우석 감독과 이춘연 상무의 열정도 인상적이었다. 제작을 맡을 황기성 대표가 <만다라>(1981) <고래사냥>(1984) 등을 기획하고 <에미>(1985) <접시꽃 당신>(1988) 등을 만든 점도 마음에 와닿았다.

 

이 영화는 훗날 <엽기적인 그녀>(2001) 등을 제작한 신씨네의 신철 대표가 한 여학생이 유서에 적은 글(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을 보고 기획했다. 신철 대표는 청소년 500여 명을 인터뷰한 뒤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작업을 의뢰했다.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던 중 김성홍 감독이 뒤늦게 맡았다. 김 감독은 계원예고 강사 경험을 살려 7박8일 만에 썼다. 황기성 대표는 시나리오를 경리 담당 여직원에게 먼저 읽게 한 뒤 제작을 결심했다. 그런데 당시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투자하는 지방 배급업자들의 반대에 부딪쳐 영상화를 포기하려고 했다. 신철 대표는 인터뷰로 알게 된 고교생 10명에게 점심을 사주면서 이 자리에 황기성 대표를 초청했다. 황기성 대표는 고교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제작을 다시 추진했다.

이은주의 상대역 봉구는 원래 김민종이 맡았다. 숱한 영화 오디션에서 고배를 마신 김민종은 촬영 한 달쯤 전에 주인공에 뽑힌 뒤 천하를 얻은 듯했다. 의상을 구입하고 대사·연기 연습에 몰두하며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크랭크인 하루 전에 주인공이 허석으로 바뀌고 말았다.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김민종은 가족하고도 연락을 끊고 이틀을 방황한 뒤 강 감독을 찾아와 ‘단역이라도 하겠다’고 토로, 봉구의 친구로 출연했다.

이미연은 ‘똑 부러지는 연기’로 주위의 기대에 부응했다. 촬영장마다 이미연을 보려는 이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은주의 영구차가 교정에 머물 때 교실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울먹이는 전교생은 공모로 뽑았다. ‘출연하고 사인도 받을 수 있다’는 공고를 보고 600여 명이 응모, 제작진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이춘연 상무는 이미연의 별명을 ‘가을 모나리자’라고 지었다. 이 상무는 “어린 나이인데 모나리자의 아우라가 풍겼다”고 했다.

 

영화는 1989년 7월 29일, 지금은 없어진 청계천 세운상가의 아세아극장에서 개봉됐다. 서울에서 15만5301

명(한국영화연감 기준)이 관람, <서울무지개>(감독 김호선)에 이어 1989년도 한국영화 흥행 2위를 기록했다.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신인여우상과 시나리오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여우상과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근간으로 한 소설도 30만 부가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소설을 각색, 영상화하는 데 몰두했던 한국영화계에 경종을 울렸다.

원래 개봉관은 중앙극장이었다. 그런데 극장 측이 외국영화 <레비아탄> 상영을 연장하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울며 겨자먹기로 아세아극장에서 개봉했다. 개봉하는 날 비가 억수 같이 왔다.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했던 이미연은 형형색색의 우산을 받쳐 들고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늘어선 관객 행렬에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 모른다.

청년은 내일을 내다보고 중장년은 어제를 돌아본다고 했다. 올해로 데뷔한 지 25년째이지만, 이미연은 내일을 본다. <회사원>으로 다시 달릴 채비를 한 이미연은 행복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연기하는 자신과 극장문을 나서는 관객이 함께 따뜻한 마음을 공유하는 인물과 작품으로 사람들의 행복지수를 더해주는 데 한 몫을 하고 싶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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