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49)은 <8월의 크리스마스> (1998)로 데뷔했다. 평단과 관객의 사랑을 아우른 이 작품을 비롯해 <봄날은 간다>(2001) <외출>(2005) <행복>(2007) <호우시절>(2009) 등을 연출, 한국 멜로영화의 역사를 새로 써왔다. 최근 감수성 짙은 예전 작품들과 궤를 달리 하는, 강렬한 드라마와 감정 묘사가 돋보이는 <위험한 관계>를 내놨다.

 

 

#이번 기회에 영화, 한 번 해볼까?
늙은 아버지보다 먼저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사진사 ‘정원’(한석규), 고단한 현실에 발을 막 들여놓은 주차 단속원 ‘다림’(심은하). <8월의 크리스마스>는 이들의 스쳐 지나가는 듯한 만남과 그 속에서 싹 트는 순백의 사랑을 그렸다. 둘의 잔잔한 만남과 이별 이야기에 삶과 죽음에 관한 화두를 담았다.


상하이 최고의 바람둥이 ‘셰이판’(장동건)과 돈과 권력을 다 지닌 신여성 ‘모지에위’(장바이즈·張柏芝), 정숙한 미망인 ‘뚜펀위’(장쯔이·章子怡). <위험한 관계>는 이들의 각기 다른 만남과 그 사이에서 펼쳐지는 욕망의 여로를 담았다. 섹스로 섹스를 거래하는 셰이판과 모지에위, 이 내기에 함몰되는 뚜펀위를 통해 사랑의 종말과 복원을 그렸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대종상·청룡영화상·황금촬영상 신인감독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았고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받았다. 서울에서 42만2930명(한국영화연감 기준)이 관람, 1998년도 한국영화 흥행 4위를 차지했다. <위험한 관계>는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을 비롯해 토론토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 초청받았다. 지난 11일 개봉, 15일까지 15만9068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이 관람했다.

<위험한 관계>는 드라마가 강렬하고 전개 또한 빠르며 각 등장 인물의 감정 묘사도 끝을 본다. 삶과 사랑을 성찰하고 사유하게 하는 멜로영화 감독으로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허 감독의 달라진 영화 세계와 이후의 행보를 기대하게 한다.

 

그런 그는 연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대우전자 홍보실에서 2년쯤 언론 담당으로 근무했다. 맡은 일에 회의가 밀려들고 회사원으로 지내는 게 갑갑했던 그는 어느 날 불쑥 사표를 냈다. 대학원에 진학, 철학을 전공하려고 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영화에 관심이 없었다. 평범한 관객 수준에도 못 미칠 정도로 본 영화도 적었다.

영화감독은 꿈도 꾼 적이 없던 그는 우연히 영화진흥위원회 부설 한국영화아카데미 신입생 모집 공고를 본 걸 계기로 영화에 입문했다. 그는 “마음 한 구석에 영상문화에 대한 관심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면서 “어쨌든 아카데미 신입생 모집 공고를 보지 않았으면, 합격하지 않았으면, 지금 영화를 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는 1984년에 개교, 올해 29기 신입생을 뽑았다. 연출·촬영·프로듀싱·애니메이션 분야에서 2012년 현재 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국내외에서 한국영화의 위상을 드높인 이들 가운데 김태용·박찬욱·봉준호·임상수·최동훈 감독 등 유명 영화인들이 즐비하다. 허진호 감독은 1992년 9기로 입학, 1993년에 졸업했다.

허진호는 아카데미 동기 유영식과 함께 연출한 아카데미 졸업작품 <고철을 위하여>로 밴쿠버국제영화제에 초청받는 등 가능성을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졸업 후 박광수 감독의 연출부로 충무로에 입문, <그섬에 가고 싶다>(1993)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작업에 참여했다. 고교 교사를 그만두고 영화계에 뛰어든 이창동을 비롯해 박기홍·박흥식·성지혜·오승욱·유영식 등과 함께 현장 수업을 받았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때에는 김정환·이창동·이효인 등과 각본 작업도 함께했다.

 

 

# 멜로영화에 담는 삶과 죽음의 철학 

허진호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를 요절한 가수 김광석의 영정 사진을 보고 기획했다. 김광석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에 ‘영화적 충격’을 받은 그는 곧바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시력을 잃어가는 사진사가 점점 더 밝은 대상을 찾아 사진을 찍는다’는 한 신문 기사를 읽고 남자 주인공은 사진사로 설정했다. 훗날 그의 죽음을 애잔한 미소로 추억하는 여자 주인공은 주차 단속원으로 정했다. 주차 위반 차량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로 제출하는 여자는 매일 남자의 사진관에 들러 인화를 맡기고 찾아간다.

영화는 이들의 만남과 이별을 그렸다. 허 감독은 남자가 맞닥뜨리는 죽음의 과정을 여느 영화와 달리 고통과 비극이 아니라 일상의 한 범주로 다뤘다. 각본·연출 작업 때 말기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들과의 숱한 만남과 대화를 상기했다.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일상과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담아냈다.

제작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영화 제목은 원래 황동규 시인의 시에서 따온 <즐거운 편지>였다. 박신양·최진실 주연의 <편지>(1997)를 감안, 제목을 바꿨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제작자인 전 우노필름의 차승재 대표(현 한국영화제작가협회장,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가 지었다. 정원과 다림이 만나고 헤어진, 여름과 겨울을 하나로 잇는, 삶과 죽음의 다름과 같음을 읽게 하는 제목으로 주목받았다.

제작비는 삼성영상사업단 등에서 외면, 일신창업투자로부터 받았다. 남녀 주인공을 캐스팅하는 데에는 3개월 정도가 걸렸다. 1순위는 한석규·심은하였다. 한석규는 <쉬리> 제작이 지연되면서, 심은하는 제작진이 김현주와 최강희를 만나고 온 날 연락을 받아 가까스로 원안대로 촬영할 수 있었다.

촬영은 9월부터 12월 초까지 했다. 서울과 익산의 화장터 등 일부 장면을 빼고 모두 군산에서 찍었다. 극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남자의 ‘초원사진관’은 한 차고를 개조한 것이다. 세트 촬영을 배제, 제작진은 전국의 사진관을 뒤졌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어느 날 지친 몸과 마음을 녹이던 한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여름 날의 묘한 느낌이 드리워진 차고를 발견한 뒤 이를 허물고 지은 사진관이다.

이 과정 또한 힘들었다. 한 달 동안 만나주지도 않던 차고 주인은 제작사의 수석 PD가 보낸 장문의 편지에 감동, 원상 복원을 조건으로 개조를 승낙했다. 이 곳은 처음 얼마간은 실제로 새로 사진관이 생긴 줄 알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극중에서 가족 사진을 찍는 이들은 실제 방문객 가운데 일부이다.

남자가 죽고 여자가 그 사실을 모른 채 사진관을 다시 찾아오는 장면에는 눈(雪)이 필요했다. 촬영시기는 11월 말이었고, 더구나 군산은 거의 눈이 오지 않는 지역이었다. 제작진은 결국 사진관 주변에 솜 200가마를 깔고 소금 300가마를 뿌려 눈이 내린 것처럼 꾸몄다. 촬영이 끝난 뒤 동네 아주머니들은 이 눈을 수거, 김장 때 쓰겠다고 했다. 제작진은 덕분에 청소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찾았던 초등학교 운동장에 눈이 흠뻑 내린 장면은 운좋게 보충 촬영 때 찍었다. 촬영을 앞둔 날 밤, 군산에 40여년 만에 폭설이 내린 것이다. 제작진은 하늘이 도와준다고 기뻐했다. 그런데 유영길 촬영감독이 첫 프린트 작업을 마친 뒤 작고, 울음을 삼켜야 했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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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인권(34)은 동국대 연극영화과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2학년 때 박종원 감독의 <송어> 연출부 막내로 현장수업을 받다가 조연을 맡은 뒤 배우로 활동해 왔다. <조폭마누라> <플라스틱 트리> <말죽거리 잔혹사> <숙명> <해운대> <방가? 방가!> <마이웨이> <퀵> <광해, 왕이 된 남자> 등에 출연했다. <강철대오: 구국의 철가방> <타워> 등이 개봉될 예정이고 방송인 이경규가 제작하는 <전국노래자랑> 촬영을 앞두고 있다.

 


‘태주’(송어) ‘이병장’(박하사탕) ‘상구’(아나키스트) ‘빤스’(조폭마누라), ‘동춘’(해운대) ‘방가’(방가? 방가!) ‘종대’(마이웨이) ‘명식’(퀵) ‘도부장’(광해, 왕이 된 남자)…. 태주부터 빤스는 1999~2001년, 동춘부터 도부장은 2009~2012년 영화에서 김인권이 맡은 인물이다. 10년 사이에 김인권이 펼쳐낸 극중 인물의 차이와 변화무쌍함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최근작 네 편에서는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는 김인권의 넓고 깊은 연기력을 맛볼 수 있다.

 

 

■저우싱츠(周星馳 주성치), 짐 캐리 열혈 팬
부산에서 자란 김인권은 고교시절 영화광이었다. 극장에 갈 돈이 없어 비디오를 즐겨 봤다. 뤽 베송 감독의 <레옹>(1994)을 서른 번쯤 볼 정도로 특정 작품을 좋아했다. <파괴지왕>(1994) > <덤 앤 더머>(〃) <에이스 벤추라>(〃) <마스크>(〃) 등도 수없이 보면서 자연스레 영화의 세계를 동경했다.


 

“장 르노, 주성치, 짐 캐리 등을 엄청 좋아했죠. 교회 연극에서 관객을 곧잘 웃겨 연기 잘 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하지만 배우가 되는 건 언감생심이었어요.”

 

김인권은 그래선지 배우보다 감독이 되고 싶었다. 감독이 된 뒤에 저우싱츠처럼 배우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이때가 고3 말. 김인권은 1996년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선배들 작품에 배우·스태프로 참여하면서 2학년 때 박종원 감독의 <송어>(1999) 연출부에서 활동했다. 박 감독의 추천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제자인 1기생 조의석의 단편 <환타 트로피칼>에 출연한 뒤 <송어>에 개를 사육하는 산골 소년 ‘태주’로 출연, 극의 하이라이트를 긴장감 넘치게 장식했다.

                     김인권은 박종원 감독의 <송어>에 산골 소년 ‘태주’로 출연, 극의 하이라이트를 긴장감 넘치게 장식했다.

 

7~8개월을 그렇게 지내면서 영화 오디션을 많이 봤다. <박하사탕>(감독 이창동) <유령>(〃 민병천) <주유소 습격사건>(〃 김상진) <공동경비구역JSA>(〃 박찬욱)…. <박하사탕>에 ‘윤순임’(문소리)이 면회 온 걸 보고하는 위병소 병장으로 출연한 거 외에는 모두 고배를 마셨다.

 

“극단 ‘배우세상’ 기획팀에서 막내 생활도 했어요. 김갑수·조재현 선배님이 함께한 연극 <물고기 남자>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다가 서대문경찰서에 불려가기도 했죠. 연극 <갈매기>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중고생 영·수 과외도 했어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런 중 <아나키스트>(감독 유영식)에서 주연을 맡았다. 1924년 상해 경신 대학살로 가족을 잃은 ‘상구’로 출연, 장동건·정준호·김상중·이범수·예진원 등과 호흡을 맞췄다. 4개월여 중국 촬영을 마친 뒤 유명 매니지먼트 회사에 소속, <챠오>(〃 고은기) <조폭마누라>(〃 조진규) <에이치(H)>(〃 이종혁)에서 주·조연을 맡았다.

 

                 <아나키스트> <조폭마누라><플라스틱 트리> <신부수업>(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졸업작품인 <쉬브스키>도 만들었다. 외계인, 외계인을 탐구하는 인간, 외계인 쇼를 보는 또다른 외계인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이다. 각본·연출을 하면서 주연도 맡아 1인 3역을 해냈다. 2003년에 졸업, 2004년에 입대하기 전까지 <플라스틱 트리>(감독 어일선) <화성으로 간 사나이>(〃 김정권) <신부수업>(〃 허인무) <말죽거리 잔혹사>(〃 유하)에서 주·조연을 맡아 개성 넘치는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반면 <파이란>(〃 송해성) <해안선>(〃 김기덕) 등은 선택받지 못했다.

 


■쥐포 구워 팔까? 탁구장 할까?
김인권은 초등학교와 대학을 함께 다닌 동기동창과 결혼했다. 입대하기 전에. 졸병 때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김인권은 집안 걱정 등으로 좌불안석의 나날을 보냈다. 2006년 11월에 제대한 뒤 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2007)로 컴백, 라면 CF도 하면서 안정을 찾은 그는 <두 얼굴의 여친>(〃 이석훈) <마이 파더>(〃 황동혁) <용의주도 미스신>(〃 박용집) 등에 이어 <숙명>(〃 김해곤)에서 송승헌·권상우 등과 함께 주연을 맡았다.

 

                 

“주변에서 이 영화 개봉되면 완전 스타가 될 거라고 했어요. 조연으로 올리면 확실히 수상할거라고도 했고. 그래서 시상식에서 상 받으면 가장 먼저 누구한테 고맙다는 말을 전할까 고민했는데, 웬걸 수상은커녕 1년을 쉬어야 했어요. IMF한파 등으로 인해.”

 

당시 충무로 공기는 싸늘했다. 출연 제안을 받은 작품이 속속 물거품이 됐다. 가까스로 투자를 받은 <숙명>과 <두 얼굴의 여친>마저 흥행에 실패하면서 김인권은 데뷔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16부작 드라마에서도 이름이 안나오는 배역이 들어올 정도였다.

 

영화계 동료·후배들 가운데 대리운전에 주차요원으로 연명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스태프 중에서는 장비를 고철로 팔아야 할지 고민하는 이들도 있었다.

“등산을 많이 다녔어요. 친구와 함께. 그 친구는 내 권유로 10년 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영화를 다시 시작했는데 그 작품도 엎어져 졸지에 백수가 됐죠. ‘길에서 쥐포를 구워 팔까? 탁구장을 할까?’….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로 괴롭고 힘든 나날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김인권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송어>에서 함께한 설경구의 전화였다. 설경구는 다짜고짜 김인권에게 “윤제균 감독 아냐? 빨리 와. 압구정동으로”라고 했다. 친구와 용인의 한 허름한 고깃집에 있던 김인권은 단숨에 압구정동으로 달려갔다.

 


그 자리에서 윤 감독과 설경구를 만난 김인권은 <해운대> 이야기를 듣고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그만큼 연기에 배고팠고 생활고도 절박했던 김인권은 ‘동춘’ 역할에 온몸을 던졌다. 품행이 불량스러운 인물을 밉살스럽지 않은 캐릭터로 펼쳐냈다. 웃음과 더불어 찡한 감동까지 자아내면서 <해운대>가 한국영화 중 다섯 번째로 ‘천만 고지’를 정복하는 데 기여했다.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등 데뷔한 지 10년 만에 스타덤에 올랐다. <방가? 방가!> <마이웨이> <퀵>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변신을 거듭, 전성기를 열어가고 있다.

“정서적으로 약자에 끌려요. 배우 유전자도 약자쪽 기질이 더 강하다고 봐요. 약자의 편에 서는 코미디가 좋아요. 망가지면서 살아남는 배역을 깊이 있게 파는 데 희열을 느껴요. 예전에는 연기의 중심에 내가 있었고 강해 보이고 싶었는데 지금은 달라요. 관객이 우선해요. 관객에게 웃음을 주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연기를 하는 걸 중요하게 여겨요. 관객을 위한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배우, 겸손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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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장영남(38)은 ‘정통파’다. 계원예고와 서울예대에서 연극을 전공했고, 창작극 전문 ‘극단 목화’와 문화창작집단 ‘수다’ 등에서 활동했다.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2002) 등을 수상한 뒤 <아는 여자>(2004)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박수칠 때 떠나라> <거룩한 계보> <헨젤과 그레텔> <하모니> <굿모닝 프레지던트> <7급 공무원> <불신지옥> <헬로우 고스트> <김종욱 찾기> <푸른 소금> 등을 통해 ‘연기파’ 배우로 각광받고 있다. <이웃사람>에 이어 <늑대소년>과 <공정사회> 개봉을 앞두고 있다.

 

 

■죽거나 혹은 죽은 여자
장영남은 극중에서 죽거나 혹은 죽은 여자 역을 적잖게 맡았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분장실> <부자유친> <코소보 그리고 유랑> <웰컴 투 동막골>, 영화 <아는 여자> <헨젤과 그레텔> <불신지옥> <헬로우 고스트> 등이 대표작이다.


 

올해 초 장안에 화제가 된 드라마 <해를 품은 달>도 빼놓을 수 없다. 장영남은 이 드라마 첫 회에 특별출연, 모진 고문을 받다가 사지가 찢겨 죽음을 맞는 무녀 ‘아리’로 열연을 펼쳤다. “미친 존재감” “소름 돋는 명품 연기” 등 시청자의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면서 <해를 품은 달>이 인기 드라마로 부상하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장영남은 첫 영화도 죽는 여자로 시작했다. <아는 여자>(감독 장진)에 ‘사고녀’로 출연했다. 야구장에서 남자친구와 큰 소리로 싸우고, 횡단보도에서 자동차에 치여 죽는 여자다. 이 여자는 죽어가면서 “ 사랑은 살아있을 때 느끼는 것”이라고 읊조린다. ‘동치성’(정재영)은 이 말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먼 길을 달려 바텐더 ‘한이연’(이나영)을 찾는다. 한이연을 그냥 좀 아는 여자에서 특별한 여자로 여긴다.

                   영화 <아는 여자>(감독 장진)의 장영남. 남자친구에게 “사랑을 잡으라” 등 소리를 지르고 투수에서 외야수로

                   전락한 ‘동치성’(정재영)이 이 소리에 신경 쓰느라 외야로 날아든 공을 잡지 않는 바람에 팀은 패한다. 

 

장영남에게 죽는 역할은 역사가 깊다. 서울예대 92학번인 장영남은 1995년 극단 목화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작은 <로미오와 줄리엣>. 세익스피어의 동명 원작을 한국적으로 풀어낸 이 작품에서 장영남은 덜컥 줄리엣 역에 캐스팅됐다. 그런데 연습을 시작한 지 한 달여 만에 잘리고 말았다. 로미오의 친구 역을 맡아 남장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 여주인공에서 졸지에 단역으로 전락한 것이다.

 

장영남은 이를 악물었다. 오기와 독기로 실력을 쌓았고 6년여 뒤 동명 연극에서 줄리엣 역을 맡아 동아연극상 여자연기상을 수상했다. 일본·독일·영국·중국 등 해외에서도 공연, 한국 연극의 기치를 드높였다. 장영남은 “그때 오태석 선생님이 저를 자르지 않았다면 오늘의 저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잘린 뒤에 배우로 살아남기 위해 독하게 마음먹고 부단히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장영남. 신인 때 당당 줄리엣 역에 캐스팅된 장영남은 연습을

                                  시작한 지 한 달만에 잘리고, 장영남은 이를 계기로 연기력을 쌓는데 혼신을 다한다.

장영남이 대학로에서 ‘캐스팅 1순위’ ‘흥행 보증수표’ ‘대학로 만인의 연인’ 등으로 손꼽힌 데에는 이처럼 인고의 세월을 거친 데 기인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은 장영남이 ‘대학로의 스타’로 등극한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장영남은 목화에 대해 “내게는 연기학교였다”고 했다. “오태석 선생님의 지도 아래 본격적으로 수업을 받았다”며 “돈을 내고 받아야 하는 석·박사 과정을 오히려 돈을 받으면서 이수하는 행운을 누렸다”고 했다. “키와 발성에 콤플렉스가 많았고, 못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면서 “선배들에게 칭찬을 듣는 날은 하늘의 별을 딴 기분이었다”고 했다. “콤플렉스가 자산”이라며 “그래서 더 악착같이 달려들었다”고 역설했다.

목화 초년 시절 장영남은 안팎으로 힘들었다. 극단에서는 연기 외 잡다한 일에 치이고, 집에서는 그만두라는 압박에 시달렸다. 계원예고와 서울예대를 나와 남부럽지 않은 스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게 했던 막내가, 늦게 들어오거나 귀가조차 하지 않는 날이 잇따르면서 시작된 집안의 반대는 거셌다. 장영남은 결국 1년쯤 무대를 떠났다.

 

“다른 일을 하려고 알아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할 줄 아는 게 없더군요. 그러니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럴수록 무대가 어른거려 동숭동을 다시 찾지 않을 수 없었어요.”

■배우의 덕목을 아는 여자
그때 계원예고 스쿨버스를 보지 않았다면, 이웃사촌 중에 연극영화과에 다니는 언니가 없었다면…. 장영남의 배우 인생은 ‘숲 속에 난 두 길 가운데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떠올리게 한다.

 

 

중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시내버스를 타고 등교하는데 창밖의 계원예고 스쿨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신호등 앞에 나란히 서 있는데 자기가 탄 버스와 저쪽 버스의 공기가 너무도 달라 보였다. 어린 마음에 이쪽이 시장통이라면 저쪽은 동화의 나라 같았다.


 

장영남은 이때 계원예고에 가자고 마음먹었다. 이때까지 장영남은 연극을 한 편도 본 게 없었다. 그런 그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것은 계원예고를 지망한 것처럼 엉뚱하다. 같은 동네에 살던 한 언니가 연극영화과에 다니는 걸 알게 된 뒤 무작정 같은 과를 지망한 것이다. 장영남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우스꽝스럽게 연극·영화와 인연을 맺게 됐다”며 “별나지만 그렇게 내 인생의 길이 정해진 게 오묘하고 ‘운명’이라는 낱말에 소름이 돋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영화배우로 활동하게 된 과정도 여느 연극배우들과 다르다. 장영남은 영화 오디션에 응모한 적이 없다. <아는 여자>는 대학 선배인 장진 감독이 연출한 연극 <웰컴 투 동막골>에 미친 여자로 캐스팅된 게 계기가 됐다. <웰컴 투 동막골>은 목화가 아닌, 처음으로 출연한 다른 극단(문화창작집단 수다) 작품이다.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의 장영남. 용의자의 치부를 북북 끍어대는 검사로 출연했다.

동명 영화에서 강혜정이 맡은 역할로 각광받은 장영남은 <아는 여자>에 이어 장진 감독의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용의자의 치부를 북북 긁어대는 검사, <거룩한 계보>에서 쌍욕으로 조폭들을 훈계하는 캐디로 주목받았다. 이후 길을 잃은 뒤 아이들에게 붙잡혀 다락에서 죽어가는 여자(헨젤과 그레텔), 점차 미쳐가는 이웃집 여자(불신지옥), 원칙을 중시하는 교도소 교정 과장(하모니), 소박하고 털털한 국정원 요원(7급 공무원), 온종일 우는 귀신(헬로우 고스트) 등 각기 다른 장르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 ‘연기파’ 배우로 각광받아 왔다.

 

 

최근작은 <이웃사람>(감독 김휘)이다. 재건축조합 설립 등 아파트 일로 동분서주하는 동안 자신과 딸이 살인마의 표적이 된 걸 모르는 부녀회장 ‘태선’으로 열연을 펼쳤다. 이 영화는 17일 현재 242만1124명이 관람했다. 오는 10월 개봉되는 <늑대소년>(감독 조성희)에서는 극의 분위기를 밝게 해주는 두 딸의 엄마, 올 연말이나 내년 초에 선보일 예정인 <공정사회>(감독 이지승)에서는 딸을 성폭행한 범인을 직접 찾아내 응징하는 엄마로 출연했다.

                    영화 <공정사회>(감독 이지승)의 장영남. 딸을 성폭행한 범인을 찾아내 응징하는 엄마로 출연해 형사 역할을

                    맡은 마동석 등과 호흡을 맞췄다. 

 

장영남은 <너무 놀라지 마라>(2009)로 동아연극상과 대한민국연극대상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산불>에 출연 국립극장 무대를 사로잡았다. ‘무대 위의 거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장영남은 “어떤 역할이 주어질지 알 수 없어 답답하지만 그게 바로 배우의 삶”이라며 “찬사는 힘이 되지만 이내 사라지는 거품 같은 것”이라고 했다. “드라마의 경우 캐스팅 막바지에 주인공이 안 된 적이 있다”면서 “그런 데 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

“주어지지 않은 배역에는 조금도 연연하지 않고 주어진 배역에는 혼신을 다해요. 스타를 꿈꾼다면 늦었을 수 있지만 배우를 꿈꾼다면 시간은 많다고 봐요. 지금처럼 배우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게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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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훈 감독(41)은 <범죄의 재구성>(2004)을 필두로 <타짜>(2006), <전우치>(2009), 그리고 올해 <도둑들>을 내놓았다. 수상·흥행기록이 돋보인다. <범죄의 재구성>으로 대종상·청룡영화상·대한민국 영화대상에서 각각 신인감독상과 각본상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과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타짜>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과 감독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각본각색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각본상을 받았다. <범죄의 재구성>은 212만9358명(한국영화연감 기준), <타짜>는 684만7777명, <전우치>(2009)는 613만6928명이 관람했다. 한국영화사상 여섯 번째로 ‘1000만 고지’를 정복한 <도둑들>은 10일 현재 1285만3717명(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이 감상, 최고 흥행작 등극을 앞두고 있다.

 

 

사기꾼들과 도둑들이 펼치는 합동작전의 전말을 그렸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사기꾼들은 한국은행 금고에서 50억 원을 빼낸다. <도둑들>에서 한국과 중국의 도둑들은 마카오의 한 카지노에 숨겨진 300억 원이 넘는다는 다이아몬드를 훔친다. 각각 ‘최동훈표 범죄영화’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준다.

■보습학원서 국어 강사
“영화는 비주얼 예술이지만 그 뼈대는 이야기에요. 그 이야기를 꾸리는 데 소설을 많이 읽고 영화를 많이 본 게 큰 힘이 됩니다.”

최동훈 감독은 초등학생 때부터 소설을 즐겨 읽었다. 밥상머리에서 소설을 읽다가 아버지한테 꾸중을 듣기 일쑤였다. ‘밥 먹을 때에는 그냥 밥 먹어라’ ‘공부를 그렇게 더 열심히 해라….’

중·고교시절과 서강대 국문학과(90학번) 재학생 때에도 소설은 그의 절친이었다. 국문학과는 제3지망이었다. 제1·2지망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적은 경영학과와 경제학과였다.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경영·경제학과에 떨어지고 국문학과에 다니면서 그토록 좋아하던 소설을 맘껏 읽은 게 오늘의 영화감독 최동훈이 되는 데 소중한 자산이 될 거라고는 그때는 몰랐다.

                                                  <범죄의 재구성> 개봉 당시 최동훈 감독.

 

신촌 대학가 인근의 헌책방에서 손꼽히는 단골이었던 그는 또 영화광이었다. 2학년 때부터 교내 영화 동아리 ‘영화공동체’에서 활동한 그는 비디오 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 ‘씨앙씨에’ 등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이른바 B자 비디오를 틀어주던 그 곳은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은 그에게 안식처이자 꿈의 산실이었다. 그는 “(비디오를) 미친듯이 봤다”고 했다. “선배들이 권하는 영화는 무조건 봤다”며 “그때는 몰랐는데 훗날 진가를 깨달은 <재와 다이아몬드>(감독 안제이 바이다) 등도 그때 본 작품”이라고 했다.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감독으로 알프레드 히치콕과 마틴 스콜세지를 우선 꼽았다.

대학생 때 그의 원래 꿈은 기자였다. 전공 수업에 소설·영화를 가까이 하느라 기자 시험 준비를 거의 하지 않은 그는 4학년 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꿨다. 졸업 후 영화감독 등용문으로 손꼽히는 영화진흥위원회 부설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진학하려고 했다. 그런데 합격 여부를 떠나 돈부터 벌어야 했다. 대학을 졸업(1997)한 마당에 부모에게 손을 벌리는 건 염치가 없어 입학금 등을 스스로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최동훈 감독이 <도둑들> 촬영 현장에서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다.

그는 이를 위해 목동의 한 보습학원에서 ‘국어! 떴다 최 선생’이란 직함으로 강사 생활을 했다. 8개월 간 강의를 맡은 뒤 1998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제15기), 2년간 수학했다. 졸업 후 임상수 감독의 <눈물>(2000)의 연출부 막내로 충무로에 입성했다. 임상수 감독 및 연출부 선배·동료들과 함께 구로동 등을 중심으로 거리의 청소년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3개월 동안 임상수 감독과 연출부에서 인터뷰한 청소년은 700여 명. 임 감독은 이를 근간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최 감독은 연출부에서 보조출연·의상·분장 분야를 맡았다.

“열정적인 임 감독에게 1년여 작업을 하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범죄의 재구성> 연출 당시 힘들 때마다 ‘감독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낼까’라고 생각하면서 고비 고비를 넘겼습니다. 감독님은 형 같은 스승이에요. <범죄의 재구성> 제작자인 차승재 전 싸이더스 대표(현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한국영화제작가협회장)도 그런 분이에요.”

■실제 사례 찾아 발품 3만리
<범죄의 재구성>은 서점에서 보험사기를 다룬 책을 본 뒤 구상했다. 대학 4학년 때 전세금 1800만원을 떼인 적 있는 그는 사기를 다룬 한국영화가 드문 점을 감안, 2001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제작사에서 전문 작가를 붙여주겠다고 했지만 고사, 혼자 매진했다.

 

최 감독은 <눈물> 작업 때 경험을 살려 발품을 팔았다. 제작사의 소개를 받아 사기 전과자 등을 만나고 사기꾼들이 자주 가는 경마장 등도 찾아가 사례와 은어 등을 수집했다. 청와대 고위직이나 검사 등을 사칭한 사기극 가운데에는 흥미진진한 게 많았다. 취재를 하도 많이 해 시나리오 작업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 먹잇감을 놓고 흙탕물 속을 뒹구는 사기꾼들의 지리멸렬한 삶을 엮으면서 ‘재미있게’를 철칙으로 삼았다. 22개월에 걸쳐 열여섯 번을 새로 썼다. 4개월여 촬영기간을 포함해 후반작업까지 약 8개월 만에 완성했다. ‘대단한 데뷔작’으로 평단과 관객의 지지를 받았다.

<도둑들> 시나리오 작업은 8개월이 걸렸다. 각본·연출 작업 당시 ‘한국판 오션스 일레븐’이란 말을 듣지 않으려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범죄의 재구성> 후반작업 때 ‘최창혁’(박신양)과 ‘서인경’(염정아)의 멜로 부문을 덜어냈던 것과 달리 <도둑들>에서는 ‘마카오 박’(김윤석)과 ‘팹시’(김혜수), ‘첸’(임달화)과 ‘씹던 껌’(김해숙) 등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줄타기·총격 등 액션을 한층 강화했다. 두 장르영화의 재미를 가미, 감상 포인트가 풍성한 범죄영화로 풀어냈다.

 

각본 작업은 영화아카데미 동기이자 <눈물>에서 연출부로 고락을 나눈 이기철과 함께했다. 제작비는 <범죄의 재구성>보다 약 네 배에 해당하는 110억원. 홍콩·마카오 해외 로케이션을 포함해 5개월 보름 동안 찍었다.

영화감독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일례로 영화아카데미 15기 열여덟 명 가운데 장편 영화를 내놓은 이는 최동훈 감독이 유일하다. 데뷔도 못한 동기들과 달리 네 편이나 연출, 작품·흥행성을 인정받아 왔다. 그런 그지만 그 역시 데뷔작을 내놓기 전에는 숱한 실패를 맛봤다. 글 꽤나 읽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작업한 시나리오는 번번이 미역국을 먹었다. 국내의 모든 시나리오 공모전에 약 10편을 춤품했지만 한 편도 당선되지 않았다. 싸이더스에서 작가생활을 하면서 쓴 두 편의 시나리오도 모두 영화화되지 않았다.

 

최 감독은 자신의 영화사 이름을 ‘케이퍼필름’이라고 지을 정도로 이른바 ‘케이퍼 무비’(caper movie)에 관심이 많다. 다섯 번째 작품으로 경찰영화, 화이트 칼라 범죄영화 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 그는 “요즘도 시네마테크에서 빌리 와일더의 <뜨거운 것이 좋아> <하오의 연정> 등을 보면서 흠 잡을 데 없는 내용과 구성, 연출력에 감탄한다”면서 “언젠가는 로맨틱 코미디도 연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데뷔 이래 지금까지 계속 오락영화를 찍었어요. <도둑들> 시사 후 제일 기뻤던 평이 ‘1급 오락영화’예요. 내가 만든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즐거워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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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51)은 1996년 <악어>로 데뷔, 올해 <피에타>까지 열여덟 편을 만들었다. 세 번째 작품 <파란대문>(1998)부터 <피에타>까지, 이른바 3대 국제영화제에만 열 편(칸-세 편, 베를린-세 편, 베니스-네 편)이 초청받았다. 2004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열 번째 작품 <사마리아>로 ‘은곰상’(감독상), 같은 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열한 번째 작품 <빈집>으로 각각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열여섯 번째 작품 <아리랑>으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그랑프리를 받았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한국의 저예산 독립영화를 대표한다. 6일 개봉되는 <피에타> 역시 한 달 동안 12회 차 촬영을 거쳐 완성했다. 악마 같은 강도(이정진) 앞에 어느 날 엄마라는 여자(조민수)가 찾아오면서 두 남녀가 겪는 혼란과 잔인한 비밀을 그렸다. 극단적 자본주의 세계에서 빚어지는 사람들 간의 충돌을 조명했다. 피에타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을 지녔다.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어떤 성적을 거둘는지, 국내 관객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는지 주목된다. 

 

■ 맞춤법 모른 채 시나리오 작업

김기덕 감독은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다. 졸업 후 청계천의 공장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세차장 등에도 다녔다. 그림과 사진을 독학으로 깨쳤다. 감독이 되는 과정에 대부분 거치는 연출부 생활도 하지 않았다. <양들의 침묵> <퐁네프의 연인들> 등, 영화를 처음으로 본 것도 서른두 살 때였다.

해병대 복무를 마친 뒤 출국, 3년 동안 프랑스에서 지냈다. 그림을 그려 거리 전시회를 갖고 판매한 돈으로 생활했다. 1993년 봄, 일시 귀국했다가 우연히 한 신문에 난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전신)의 시나리오 공모 광고를 본 걸 계기로 진로를 바꿨다.

김 감독은 자신의 프랑스 생활 경험담 등을 소재로 방송사 6부작 드라마와 장편 영화 시나리오를 써서 출품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원래 계획대로 다시 프랑스로 가자는 마음 한 켠에 오기가 발동,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부설 영상작가전문교육원 기초반에 등록했다. 주간반인데 야간반까지 도강을 하면서 6개월간 수업을 받았다.

수강생은 대학 국문과·문예창작학과 출신과 이미 영화 현장에서 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김 감독은 영화 기초는 물론 맞춤법조차 엉망이었지만 주눅들지 않았다. 과제물인 단편 시나리오를 쓰는 동료들과 달리 오기와 뚝심으로 장편 창작에 몰두했다. 세 편을 완성, 교육원 내 창작상에 출품했다. 응모작은 다섯 편에 불과했지만 김 감독의 작품은 세 편 모두 수상하지 못했다.

김 감독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문반에 등록했다. 6개월간 수업을 받으면서 또 세 편을 완성, 창작상에 내놓았다. 수료식 때 <화가와 사형수>로 대상을 수상, 10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달라지는 게 없었다. 작가라고 불러주는 이도 없었고 영화사에서 찾아주지도 않았다. 다시 연구반에 등록, 장학생으로 공부하면서 두 달에 한 편씩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전에 계속 출품했다. 예심에서 두 번 떨어지고 1993년 말 세 번째 응모 때부터 본심에 올랐다. <검은 해병>이 34강, <배>가 24강, <이중노출>이 8강에 올랐다. 그리고 1995년 7월 <무단횡단>으로 대상을 수상, 충무로에 입성했다.

<무단횡단>은 처음에는 예심에서 떨어졌다. 심사를 맡았던 박철수 감독이 옆방의 심사위원들에게 갔다가 예선 탈락작 가운데 하나인 <무단횡단>을 우연히 읽고 본인 심사 시나리오에 첨부해 본선에 올렸고, 전체 심사 결과 대상을 받았다.

 

■<악어> 제작사 세 번 바뀐 끝에 완성
김 감독은 대상 수상 후 한맥영화사와 하명중영화제작소 전속 작가로 활동했다. 영화사에 본 충무로 상황은 열악했다. 영화사와 자신이 지향하는 영화도 달랐다. 김 감독은 사표를 내고 데뷔작 준비에 들어갔다. 성동구 자양동에 살면서 성수대교·한강대교 등을 오가면서 곧잘 목격했던 자살사건과 시체를 건져주면서 살아가는 일명 ‘머구리’를 소재로 <악어>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투신자살한 이들의 시체를 숨겨두었다가 유족에게 넘겨주고 받은 돈으로 살아가는 부랑자(조재현)의 삶과 죽음을 그렸다. 현장 취재, 자료 수집을 거쳐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전국의 계곡·수영장을 뒤져 수중촬영 대안까지 마련했다.

제작~개봉 과정은 지난했다. 제작자들은 김 감독의 연출부 경험이 전무한 점 등을 놓고 시나리오만 팔 것을 요구했다. 김 감독은 돈보다 연출을 고집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 제작사의 요청으로 제작자가 선정한 촬영감독에게 테스트까지 받고 시나리오·미술감독료까지 포함해 500만원을 받고 연출도 맡았다.

주인공 ‘용패’ 캐스팅도 난항을 거듭했다. 출연료·일정 등의 문제로 최재성·박상민·한석규 등의 캐스팅이 물거품이 된 뒤 조재현이 남다른 조건 없이 출연을 결정,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 촬영한 장면들은 연출 미숙으로 모두 버려야 했다. 2억여원의 제작비가 추가될 상황을 맞으면서 중단 직전까지 간 끝에 가까스로 완성할 수 있었다. 4개월여 촬영 도중 제작사가 세 번이나 바뀌었다. 김 감독은 이 과정에 촬영감독에게 핀잔을 많이 들었다. 한 제작자에게는 맞기까지 했다. 수중촬영장을 재점검하느라 촬영장에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도착한 게 화근이었다. 김 감독은 울면서 김밥을 먹은 뒤 스태프를 다시 규합, 촬영을 재개했다.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촬영·제작 중단은 피해야 했기에. 이 제작자는 조재현의 중재로 김 감독에게 사과했다.

촬영 중에는 현장 인근 다리에서 세 명이 투신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 명은 사망했고 두 명은 구조됐다. 출동한 구조대와 경찰, 머구리들의 실제상황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이 충격으로 며칠간 촬영이 중단됐고, 장마로 모든 자재가 물에 잠기기도 했다.

마지막 촬영은 수중장면이었다. 세트 회사에서 2000만원을 요구하자 김 감독은 재료를 구입하고 인부를 고용해 700만원을 들여 수중 세트를 만들었다. 한강대교 교각 세트를 올림픽수영장 5m 풀에 집어넣고 바닥에 모래를 깔아 촬영을 했다. 조재현은 72시간 동안 물 속을 드나들며 사투를 벌였다.

 

영화를 완성한 뒤에 김 감독은 극장주를 찾아다녔다. 영화를 보고 개봉해 달라고. 그런 끝에 서울 명보극장에서 1996년 11월 16일에 개봉, 3284명(한국영화연감 기준)이 관람했다. ‘얼치기 아마추어 영화’ 등 혹평과 더불어 ‘어설프지만 모든 걸 뛰어넘으려는 주목할 영화’ 등 잠재력도 인정받았다. 천리안·나우누리·유니텔 영화동호회 회원들은 합동 유료 시사회를 마련, 동전까지 모아 김 감독에게 전했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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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 2012.09.26 0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어요.

배우 고창석(42)은 남다른 개성·연기력·이력을 지녔다. 그는 탈출 동아리, 노래패 겸 극단, 마임극단을 거쳐 ‘충무로’에 입성했다. 부산외대 총학생회장을 지냈고, 철공소 등에도 다녔으며, 뒤늦게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했다. 최근 400만 명이 넘게 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비롯해 <퀵> <시체가 돌아왔다> <고지전> <맨발의 꿈> <헬로우 고스트> <혈투> <의형제> <영화는 영화다> <바르게 살자> <괴물> <친절한 금자씨> <마지막 늑대> 등 20여 편에 출연했다. 요즘 <협상종결자>(가제) <조선미녀 삼총사> 등을 찍고 있다. 

 

 

■시작은 미미했으나…
머리를 양 갈래로 딴, 조조의 무덤을 통째로 털었다는 전설의 도굴 전문가 ‘석창’. 경찰 ‘최철곤’(양동근)과 ‘고정식’(황정민)이 기차에서 다툴 때 중간에 앉아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남자 ‘실눈’. 고창석이 최근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영화 데뷔작 <마지막 늑대>(2004)에서 맡은 배역이다. 석창은 주인공, 실눈은 단역이다.

<마지막 늑대>에서 고창석은 출연료로 100만원을 받았다. 그는 내심 얼마나 환호했는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그해에 세 달 넘게 연습하고 한 달 동안 공연한 동아연극상 수상작 <벚나무 동산>에서 받은 출연료는 35만원이었다.

고창석은 이후 열심히 오디션을 봤다. <친절한 금자씨>(2005)에 총기 기술자인 ‘우소영(김부선)의 남편’, <야수>(2006)에 ‘구룡파 어깨’, <예의 없는 것들>(2006)에 ‘피아노맨’, <괴물>(2006)에 ‘격리공간 조무사1’, <아이스케키>(2006)에 ‘경찰1’, <수>(2007)에 ‘야쿠자1’로 출연했다.

                                                    <친절한 금자씨>의 고창석(오른쪽)

<친절한 금자씨> 촬영은 사투리 억양이 남아 있어 힘들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겠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원래 말투대로 하라”는 김부선의 조언에 힘입어 촬영을 마쳤다. <예의 없는 것들>에선 하루 촬영을 위해 피아노까지 배웠는데 편집 때 잘렸다. <야수>에서는 “야, 없어?” 등 대사가 짧았다. 10분 만에 끝냈다. 반면 <괴물>에서는 “원효대사가…” 등 대사가 두 줄에 불과했는데 쩔쩔맸다.

<괴물>은 1301만9740명이 관람한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이다. 훗날 보너스가 100%씩 지급됐다. 후배들도 받았는데 고창석은 못 받았다. 함께한 친구가 봉 감독이나 제작사에 대신 말해주겠다고 했을 때 고창석은 “가만 있어라, 씨…” 했다. 소임을 원활하게 다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두 영화가 아니었다면…
일련의 출연작을 통해 고창석은 영화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가운데 <바르게 살자>(2007) 시나리오를 받았다. 배역은 조연인 형사반장 ‘우종대’ 였다. 시나리오도, 캐릭터도 좋았다. 고창석은 이번 기회에 영화를 제대로 알아보자고 마음 먹었다. 3개월간 삼척 등 촬영장에 머물면서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고 습득했다.

                 <영화는 영화다>의 고창석. 고창석은 이 작품으로 제1회 KMDb 초이스어워도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이후 <영화는 영화다>(2008)에 출연했다. 고창석은 처음에 출연을 고사했다. 극단 일을 좀 봐야 했고, 저예산 작품이어서 출연료도 적을 것 같아. 그런 중 ‘봉 감독’ 역에 고창석을 놓고 각색했다는 장훈 감독의 말에 마음을 바꿨다. 배우로서 더할 수 없는 영광이었던 것이다.

봉 감독 캐릭터는 고창석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그런 데에다 청신호가 잇달았다. 첫 미팅 때 평소 차림으로 갔는데 “준비해 오셨네요”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 이런 상황은 촬영을 할 때에도 잇달았다. “의상은?” “오늘 입고 오신 거 좋은데요”, “메이크업은?” “지금 그대로 노메이크업으로 하죠”…. 촬영 초반 회식 때 “찍기 전에 하다 못해 커피라도 같이 하면서 얘기하면 좋은 것 같다”고 했는데 그게 현실화되면서 현장 분위기가 한층 좋아졌다. 리허설인 줄 알고 연기했는데 그 촬영으로 “컷! 오케이!”라는 말을 곧잘 들었다. 모니터를 볼 새도 없이 속전속결로 자신의 분량 촬영을 마쳤다.

                <영화는 영화다>에서 ‘봉 감’의 모자ㆍ선글래스ㆍ의상 등은 고창석이 일상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연기를 했다가 칭찬받은 연극 연습 때 생각이 났어요. 연기 아닌 연기가 진짜 연기라는 걸 알게 됐죠. 두 영화가 아니었으면 배우를 계속 하는 게 힘들었을 거예요. 두 작품을 계기로 영화와 연극, 일상과 연기를 넘나드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게 됐으니까요.”

■그때 그냥 포기했다면…
고창석은 부산외대 일문과 89학번이다. 신인생 환영회 때 고창석은 만취, 학우들이 데려다 준 탈춤 동아리방에서 잤다. 고창석은 그 인연으로 탈춤반에 들어갔다. 장구 소리가 좋았고, 장구 치고 탈춤 추는 게 재밌었다. 제대로 배우려고 겨울에는 주로 남원 전수관에서 지냈다. 집 생각이 날 때면 더욱 더 장구와 춤에 매달렸다.

운동권이었던 고창석은 1993년 3학년 때 총학생회장을 맡았다. 민주화운동에 지친 데에다 나름 할 만큼 했다고 여긴 그는 이듬해 ‘희망새’라는 노래패 겸 극단에 들어갔다. 이전까지 연극이나 연기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1년간 해보려고 했다. 선후배의 무시와 빈정거림 등에 오기가 발동, 4년여 동안 땀을 흘렸다. 배우 장(長)으로 대접받았다.

 

당시 짬을 내 부산 옆의 양산에 있는 공장에 다녔다. 음료용으로 쓸 배를 깎고 갈았다. 철공소에도 다녔다. 이후 희망새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와 함께 공부를 하자고 상경, 1998년 서울예대 연극학과에 동반 입학했다. 스승·동문들과 함께 마임(mime)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 ‘사다리 움직임 연구소’를 창단, 선임배우로 활동했다. 연극 <시간의 사용> <벚나무 동산> <보이첵>, 뮤지컬 <가스펠> <사랑하면 춤을 춰라> 등에 출연했다. 공연기획사 ‘코아 프로덕션’을 창립, 가족 뮤지컬 <반 고흐와 해바라기 소년> 등을 올렸다.

■연극을 하지 않았다면…
고창석은 ‘폭풍 존재감의 씬 스틸러’로 인정받고 있다. 개성 있는 외모와 연기력으로 흥행에도 결정적 기여를 해왔다. 대표작으로 27일 현재 415만9841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이 관람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비롯해 312만5069명(퀵), 294만5151명(고지전), 310만9780명(헬로우 고스트), 541만6829명(의형제), 118만7684명(인사동 스캔들), 131만1118명(영화는 영화다), 213만5606명(바르게 살자) 등이 있다.

                고창석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토굴 전문가 ‘석창’으로 출연, 차태현 등과 호흡을 맞췄다.

……

최근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또 다른 <도둑들>이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아홉 명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금보다 귀한 얼음을 훔쳐내는 과정을 그렸다. 고창석은 출연작을 정할 때 “시나리오보다 함께하는 동료들이 누구인지에 더 무게를 두는 편”이라고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대해 “컨셉트가 신선하고 차태현·성동일·신정근·오지호·민효린 등과 재미있게 찍을 수 있을 것 같아 선뜻 출연한 작품”이라며 “촬영 과정과 결과가 모두 좋아 매우 흡족하다”고 했다.

고창석은 변신에 대해 “조금씩 폭을 넓히고 있다”면서 제18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남우조연상 수상작인 <맨발의 꿈>(2010)과 <혈투>(2010) <부산>(2009) 등을 들었다. 이어 “심각한 역할 제안도 받고 있는데 그런 역할은 연극에서 많이 했고, 앞으로 더 들어올 것”이라며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영화를 하고, 연극·뮤지컬에 출연하면서 제작도 하고 싶다”고 했다.

“10여 년 동안 사물놀이·탈춤·노래·마임을 한 게 연기의 원동력이에요. 웃기고 울리고 감동을 주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그럴 수 있는 연기의 진정성은 현장은 물론 일상의 삶에서 축적된다고 봐요. 현장 안팎에서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고창석은 심각한 이야기도 무심하게 털어놓는 등 남다른 화술과 유머로 인터뷰 내내 폭소를 자아내게 했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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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택수 2012.09.07 22: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배장수라기에 나주 배를 파는 과일장사인 줄 알고 들어왔소..

김윤석은 연극배우 출신 영화배우를 대표한다. 최근 <도둑들>로 ‘1000만 영화’ 주인공 대열에 합류했다. <타짜>의 조연으로 주목받기 시작, 첫 주연작 <즐거운 인생>을 필두로 <추격자> <거북이 달린다> <전우치> <황해> <완득이> 등을 통해 남다른 연기력과 흥행력을 인정받아 왔다. 요즘 임순례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를 찍고 있다.

 

배우의 길은 연기력과 흥행성적에 좌우된다. 김윤석(44)은 연기력은 물론 남다른 흥행성적을 낸 최고의 배우로 손꼽힌다. <즐거운 인생>(2007)으로 126만3835명, <추격자>(2008)로 507만1619명, <거북이 달린다>(2009)로 305만9812명, <전우치>(2009)로 613만6928명, <황해>(2010)로 216만7426명, <완득이>(2011)로 531만502명, <도둑들>로 1112만7671명(8월 19일 현재) 등 이제까지 3413만7793명을 동원했다. 최근 5년 동안 이같은 성적을 거둔 배우는 김윤석이 유일하다.

 

■부산으로 돌아가 라이브 카페 등 운영
살다보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던 것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이 개인이 아니라 구조적인 데 있다고, 시간을 유예시킨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다고 여겨질 때 용기있는 사람들은 모험을 감행한다. 김윤석이 그랬다. 30대 초반에 배우생활을 접고 부산으로 돌아가 이때부터 5년간 연극·영화와 인연을 맺지 않았다.


김윤석은 “연극이라는 것 자체가 가지는 속성에 대해 회의가 생겼다”고 했다. “공연은 필름으로 남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회의가 짙게 밀려왔고, 내가 추구하는 것 때문에 부모·형제와 주변 사람들이 받는 고통도 무시하기 힘들더라”고 했다. “한번 생각을 바꾸니까 연기를 하지 않아도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싶어 배우 생활을 접었다”고 털어놨다.

경제적인 문제도 적지 않았다. 연극 한 편 올리는 데 걸리는 기간은 3개월 정도인데 수입은 50만 원에 불과했다. 한 달에 50만 원이 아니라 세 달에 50만 원이어서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무대에서 느끼는 희열로 심신의 고단함을 달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다시 부산에 둥지를 튼 김윤석은 지인의 부탁으로 라이브 재즈카페를 봐주기도 했다. 음악과 술에 취해 살면서 처음에는 좋았다. 사람들에 치이는 것도 참을만 했다. 그런데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장사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문제를 떠나 매일 밤 술을 마셔 얼굴은 늘 붉었고 살이 퉁퉁하게 쪘다. 몸도 풍선처럼 부풀었다. 옷 사이즈가 어마어마하게 늘 정도로. 김윤석은 “30대 초반인데 거의 반평생 산 사람의 모습이었고, 청바지 뒷주머니에 현금이 가득 든 지갑을 넣었을 때 뒤태가 가관이었다”며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가차 없이 접었다”고 털어놨다.

 

 

■“배우가 뭐해, 배우는 연기해야 돼”
자신의 꿈을 격려해 주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 건 복이다. 부산에 있는 동안 김윤석은 종종 김해가 고향인 송강호의 전화를 받았다. “배우가 연기 안 하고 뭐 하고 있느냐?” “서울로 와서 다시 연기를 하라….”

김윤석은 송강호의 말처럼 다시 연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배우로 생존하면서 생활도 해야 하는, 그 고난한 삶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게 망설여졌다. 낙향할 때보다 더 뜨거운 용기를 필요로 했다. 한 가닥 남아있는 자존심도 걸림돌이었다.


 

자신과의 싸움이 계속 됐다. 현재의 삶에 드리운 빨간불을 목격하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달라져야 한다는 절박감에 휩싸였다. ‘네 젊음을 어디에 던지고 싶은가?’

 

대답은 연기였다. 묻고 또 물어도 정녕 하고 싶은 건 연기였다. 다시 한 번 가보자, 미련 없이 달려들어 보자고 마음먹고 새 세기가 시작될 즈음 짐을 쌌다. 친분이 있는 극단 ‘학전’을 찾아가 뮤지컬 <의형제> 등에 출연했다.

                     <범죄의 재구성>(왼쪽)과 <타짜>(오른쪽)의 김윤석.

 

<의형제>는 한국전쟁부터 1970년대 말을 배경으로 쌍둥이 형제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렸다. ‘꼴통’ 역을 맡은 김윤석은 이 작품으로 전윤수·최동훈 감독, 배우 조승우·방주란 등과 남다른 인연을 얻었다. <의형제>를 관람한 전윤수 감독의 <베사메무초>(2001)에 ‘집달관1’로 출연해 영화와 인연을 맺었고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2004)과 빅히트작 <타짜>(2006)에 각각 ‘이 형사’와 ‘아귀’로 등장해 주목을 끌었다. <의형제>에서 해설자이자 걸인으로 출연한 조승우와 <타짜>에서 호흡을 맞췄고, ‘어머니’ 역을 맡아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방주란과 2002년 결혼해 두 아이를 두고 있다.

 

■평생 갈 길, 거북이 걸음으로 정진

필연은 우연에서 출발한다. 충북 단양이 고향인 김윤석은 1986년 부산 동의대학교 독어독문학과 1학년 2학기 때 연극과 우연히 인연을 맺었다. 민주화 투쟁으로 휴교·휴강이 잇따라 입대를 염두에 뒀던 그는 어느 날 야외에서 극예술동호회 소속 교우 몇 명이 모여 연극 연습을 하는 걸 보고, 그 모습과 열정에 매료됐다. 곧바로 입회,  <색시공> 등에 출연했다.  2학년 때에는 기성 극단 무대에도 뛰어들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에도 출연했다. 전공 수업은 아랑곳 않고 연극에 몰두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혈혈단신으로 상경, 소극장 연극의 메카로 손꼽히는 ‘연우무대’를 찾아갔다. 여느 극단과 달리 연우무대는 단원제가 아니고, 워크숍 공연도 갖지 않아 입단이 불가능했다. 김윤석은 그럼에도 무작장 청소부터 시작했다. 언젠가는 받아주겠거니 하고.

 

이때 같은 처지의 송강호를 만났다. 부산에서 연우무대의 <최선생> 공연을 보고 무작정 상경한 송강호를 만나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배우의 꿈을 키웠다. 연우무대의 <국물 있사옵니다>(1993)를 필두로 <여성반란> <지젤> <자전거>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등에 함께 출연했다. 장현성·설경구·황정민·조승우와 함께  극단 학전의 ‘독수리 5형제’로 불리면서 배우와 스태프로 땀을 흘렸다. 대개 그러하듯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고 입장권도 팔았다.

김윤석은 “학전의 김민기 선생님이 멘토”라며 “학전에서 3년간 연기를 하면서 연출부로도 뛰었다”고 했다. “연극은 종합예술이자 노동”이라며 “전방위로 달리고 또 달리면서 완성을 추구하다 보면 정신적·육체적 거품이 빠지면서 진정성을 갖게 되고 그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근원으로 본다”고 했다.

 

송강호·설경구·황정민·조승우 등이 영화계에서 먼저 인정을 받을 때 ‘조바심이 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바로 그 조바심이 사람을 망치게 한다”고 답했다. “평생을 할 일인데 조금 빠르거나 늦는 게 무슨 대수겠느냐”며 “관건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온전히 잘 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고 했다.

연기력이 힘이다. 인내로 정진. 김윤석이 그랬다. 김윤석이 달린다. 거북이 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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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우 감독(42)은 대학 1학년 때부터 ‘충무로’ 생활을 병행했다. 코미디와 액션 등을 버무린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 특사> 등을 집필, 국내 최초로 억대 시나리오 작가로 등극했다. 이후 실력을 검증받은 코미디가 아닌 춤 소재 드라마 <바람의 전설> 등을 연출했다. 재난을 다룬 가족영화 <연가시>로 흥행에도 성공, 영화감독을 지망한 지 23년 만에 ‘재미있고 의미있는 영화를 만들자’는 꿈을 이뤘다.

 

 

■한 초등학생 덕분에 빛 봐
박정우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도 한 <연가시>는 ‘돈’ 때문에 벌어진 재난을 다뤘다. 여느 재난영화와 달리 양심과 도덕, 상식과 정의를 저버리고 탐욕을 쫓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비극을 보여준다. 지난 7월 5일 개봉, 12일 현재 451만950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이 관람했다. <도둑들>(923만7488명)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468만3598명) <내 아내의 모든 것>(458만8445명) 등에 이어 올해 한국영화 흥행 4위에 올라 있다. 한국영화 역대 흥행 순위는 37위로 그가 시나리오를 쓴 작품 가운데 최고 성적은 거둔 <신라의 달밤>(441만8658명·38위)을 앞질렀다.

<연가시> 제작은 한 대학생과 초등학생 덕분에 시작됐다. 대학생은 박 감독에게 연가시의 존재를 알려줬고 초등학생은 투자를 받는 데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줬다.

공포문학 동호회 소속인 대학생은 2008년 봄에 한 방송사의 아마추어 작가 단편영화 전문가 품평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박 감독은 방송 이후 이 대학생을 따로 만나 그로부터 열 편의 습작을 건네 받았다. 이 가운데 한 편이 단편 <연가시>다. 박 감독은 변종 연가시의 독특한 특성에 초점을 맞춘 공포영화로 풀어내다가 그만두었다.

 

 

이로부터 1년여 뒤 곱등이 연가시 출현이 인터넷을 뜨겁게 장식했다. 검색어 1위에 오른 걸 보고 박 감독은 ‘누군가가 영화로 만들겠구나’ 하고 여겼다. 하지만 가시화되는 작품이 없었다. 한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재난영화로 풀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다시 시나리오 작업에 달려들어 2010년 가을에 완성했다. 유명 투자·배급사에 시나리오를 보낸 뒤 CJ엔터테인먼트의 연락을 받았다. 박 감독은 훗날 CJ 관계자에게 초등학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날 초등학생인 아들이 <연가시>를 꼭 영화로 만들어 달라고 하더군요. 책상에 수북히 쌓여있는 시나리오 가운데 유독 <연가시>를 봤다는 게 뜻밖이었고 연가시를 모르는 친구들이 없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어요. 곧바로 시나리오를 탐독했죠.’

■‘웃음과 눈물의 마술사’

박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개봉작은 <마지막 방위>(1997)부터 <연가시>까지 열두 편이다. 각색을 한 작품이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 <강력3반>(2005) 등 두 편이다. 이 가운데 <키스할까요>(1998) <주유소 습격사건>(1999) <선물>(2001) <신라의 달밤>(2001) 등은 암 투병 중인 어머니를 돌보면서 병원 보호자 대기실과 사무실을 오가면서 썼다.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는 제작진의 ‘좀더 재미있고 애달프게 해달라’는 주문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수정작업까지 마쳤다.

 


당시 박 감독의 어머니는 한 달 단위로 1주일 정도 입원해 항암제를 맞거나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주변에서 권한 민간요법도 받았다. 박 감독은 고통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관객을 더 웃기고 울릴 수 있는지를 궁리했다. 이런 상황의 아이러니에 눈물을 흩뿌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불치병을 앓는 아내(이영애)를 두고 어떻게든 남을 웃겨야 하는 무명 개그맨 남편(이정재)의 이야기를 그린 <선물>은 자신의 이같은 경험을 토대로 쓴 작품이다.

■학교 수업과 영화 촬영 병행
박 감독은 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영화계로 뛰어들었다. ‘대학은 졸업한다’는 조건 아래 부모에게 영화 하는 걸 허락받은 그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연출부 막내로 뛰면서 학업도 병행했다. 현역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에서 연출부, <꼬리치는 남자>(1995)와 <체인지>(1996)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할 때에도 학업을 병행했다. 부모님이 ‘영화를 계속 하면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해 학비는 자신의 수입으로 냈다. 소설 <낙서금지>를 냈고, 가수 윤하영의 노래 <너의 두 눈으로 하늘을 본다> 등의 가사를 쓰고, <주유소 습격사건>과 <신라의 달밤> 주제가도 썼다.

 

 

영화사 사무실에서 기숙하며 시나리오 습작에 매달린 그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 작업 때 쓴 <내 짝을 찾습니다>가 당시 삼성영상사업단의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체인지> 막바지 작업 때 <마지막 방위> 시나리오를 의뢰받으면서 조감독 생활을 접었다.

<마지막 방위>는 10여일 만에 완성했다. ‘초고를 빨리 쓰는 작가’로 이름을 얻은 그는 <산책>(2000)과 <키스할까요>를 동시에 의뢰받아 각각 보름 만에 초고를 넘겼다. 초고가 나와 있던 <신라의 달밤>은 재작업을 의뢰받은 뒤 원작의 제목과 캐릭터만 살려 1개월 만에 새롭게 완성했다. <연가시>는 이와 달리 약 1년 간 시나리오를 열네덧 번 수정했다. ‘청소년 관람불가’와 ‘전체관람가’를 오가면서 표현 수위와 메시지를 조절했다. 이제까지 각본 혹은 각본·연출을 맡은 작품 가운데 이같은 경우는 처음이다.

■흥행작가에서 흥행감독으로

박 감독은 <연가시>에 앞서 연출한 <바람의 전설>(2004)과 <쏜다>(2007)로 쓴맛을 봤다. 자신의 주특기를 살려 기발한 코미디 영화를 만들거라는 주위의 기대를 잇따라 저버린 댓가를 톡톡히 치렀다. ‘잘 할 수 있는 걸 놔두고 딴 짓을 한 바보’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다. 하지만 박 감독은 작가시절을 반복하는 건 감독으로서 의미가 없다면서 뜻을 접지 않았다. 세 번째 작품을 준비하면서 이번에도 실패하면 다시 기회를 잡는 게 힘들 수 있다는 생각에 코미디를 고려하기는 했다. 하지만 ‘잘 되면 그거 보라고 하고, 안 되면 이제는 코미디도 안 되네’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 탈 코미디를 고수했다.

 


<연가시>는 이렇듯 도전으로 일관해온 박 감독의 영화인생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시나리오 작가 시절에는 남다른 아성을 구축했지만 감독으로서는 작품·흥행성을 인정받지 못한 데에서 벗어나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박 감독은 “코미디가 아닌 작품을 잘 만들 수 있는 걸 보여준 게 기쁘다”고 했다. “영화는 감독이 만드는 거라면서 전권을 행사했던 예전과 달리 <연가시> 때에는 달라진 시스템 내에서 출연·제작진의 의견을 기꺼이 수용했다”면서 “영화는 함께 만드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연가시>로 얻은 결실 가운데 하나”라고 털어놨다.

박 감독은 <연가시>를 연출하면서 두 전작에서 함께 땀을 흘린 후배들을 조감독으로 영입했다. <식객2:김치전쟁>을 공동연출한 김길형 감독과 데뷔작을 준비하고 있던 이성준·한윤복영 등이다. 영화·드라마 기획회사 ‘Story Park’을 설립한 박 감독은 요즘 세 후배를 위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감독으로서 겪은 어려움을 후배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험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해준 뒤 자신의 다음 작품을 준비할 계획이다.

 

 

 

[영화 내사랑] 영화감독 박정우가 본 <람보2>

(2008년 2월 14일, 스포츠칸)

 

중학교 땐지, 고등학교 때인지 가물가물하다. 두들겨 맞지 않기 위해, 사람대접 받고 살기 위해, 죽어라고 책만 파고 살던 삭막한 학창 시절이었음은 분명하다.

우연히 신문에 실린 영화 <람보2> 광고에 '개봉일 선착순 100명 기념 티셔츠 증정!'이라는 문구에 필이 꽂혔다. 학창 시절에 추억거리 하나 만들자며 꼬드긴 친구놈들과 함께 개봉 전날 밤 극장 앞으로 달려갔다. 영화 제목, 주인공, 줄거리… 그 따위 거 일절 관심도 없이 말이다.

내가 왜 그때 그 쓸데없는 공짜 티셔츠에 이성을 잃었는지는 평생 미스터리다. 그 당시 옷이 없어서 벗고 산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무튼 나와 친구들은 극장 매표소 앞에다가 주어온 과자 상자를 깔아놓고 둘러앉아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고스톱까지 쳐가며 아침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누가 보면 영락없이 집 나온 가출 청소년들의 모습으로 말이다. 내가 제안한 거지만, 택시 잡아타고 돌아오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주저앉은 게 여러번이었다. 그러고 있는 내 자신이 무지하게 한심스럽더란 말이다.

 


그런데 아침 해가 뉘엿뉘엿 밝아올 즈음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극장 앞으로 달려오기 시작하더니, 입장권을 팔기 시작했을 때에는 매표소 앞에 늘어선 줄의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었고, 그 기나긴 대열 맨 앞에 나와 내 친구들이 우뚝 서 있었다. 밤새도록 날 비웃던 한심스러움이 묘한 뿌듯함과 쾌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역시 부지런한 놈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구나! 남보다 앞선 자리에 섰을 때 이런 뿌듯함과 쾌감이 있구나!'

그러나 난 결국 그날 영화를 보지 못했다. 목적한 대로 기념 티셔츠를 받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서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밤을 꼴딱 새운 후유증 때문에 본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틀어주는 광고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눈을 뜨니까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있었다. 결국 그 영화는 제법 시간이 지나서 개봉 열기가 어느 정도 식은 후에 다시 극장에 찾아가서 줄 서서 표 끊고 봤다.

영화 내용은 간단했다. 맷집 무지하게 좋은 주인공이 온갖 위험과 역경을 헤치고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는 뻔하디 뻔한 영웅담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뻔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주인공의 맷집, 그게 또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거다. 그래, 결국엔 맷집 좋은 놈만이 살아남는다. 최후의 승자는 실력도 용기도 지혜도 아닌, 맷집 좋은 놈이다. 맷집을 기르자.

그로부터 어언 20여년이 흐른 지금, 이 비정한 영화판에서 나는 여전히 죽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다. 내가 실력이 좋아서? 인간관계가 좋아서? 처세술이 뛰어나서? 운이 좋아서? 천만의 말씀이다. 부지런함과 맷집, 이걸로 버티고 있는 거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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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41)는 27년차 배우다. 27년째 주연 배우다. 데뷔작 <깜보>부터 최근작 <도둑들>까지 25편의 영화에서 줄곧 여주인공을 맡았다. <어른들은 몰라요> <오세암> <첫사랑> <닥터봉> <영원한 제국> <신라의 달밤> <YMCA야구단> <얼굴없는 미녀> <타짜> <좋지 아니한가> <열한번째 엄마> <바람피기 좋은 날> <모던 보이> <이층의 악당> 등에서 소녀와 여인을 오가며 부침 없이 달려왔다. 각기 다른 여성의 다양한 삶을 밀도있게 소화,  대종상·청룡영화상 등의 여우주연상과 인기상을 10여 차례 수상했다.

 

 

팹시는 <도둑들>(감독 최동훈)에서 김혜수가 맡은 배역이다. 새내기 소녀와 톱스타가 된 여인의 매력을 읽을 수 있다. 1985년과 2012년, 한국영화의 어제와 오늘도 확인하게 해준다.

■ 삼고초려
5년 만에 출옥한 ‘깜보’(장두이)는 떠버리 소매치기 ‘제비’(박중훈)를 만난 뒤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출감한 지 일주일 만에 살인사건 용의자로 쫓기는 신세가 된 깜보는 혐의를 벗기 위해 제비와 함께 나영을 찾는다. 밤무대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를 구성지게 부르는 나영을 만나 시계의 출처를 캐묻지만 나영은 영문을 모른다.

감옥에서 막 출소한 팹시는 ‘뽀빠이’(이정재) ‘예니콜’(전지현) 등과 인생 최고의 반전을 꿈꾸며 홍콩으로 향한다. 2천만 달러에 달하는 희대의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을 훔치기 위해. 그 곳에서 몇 년 전 배신의 아픔을 안긴 ‘마카오박’(김윤석)을 만난다. 마카오박의 뒤통수를 치겠다는 의중과 달리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다.

‘우연’은 ‘필연’의 다른 말이라고 했다. 중학교 3학년, 열다섯 살 나이에 출연한 ‘연소자관람불가’ 영화 <깜보>로 단번에 주목받은 김혜수의 데뷔 과정은 이 말은 떠올리게 한다.

 

<깜보>로 데뷔할 당시 김혜수는 건강을 위해 익힌 태권도 솜씨 덕분에 출연한 음료·제과 CF로 주목받고 있었다. <깜보> 출연은 김혜수의 CF를 눈여겨 본 이황림 감독의 조감독이 추천하면서 이뤄졌다.

 제작진은 김혜수를 캐스팅하기 위해 삼고초려를 했다. 부모를 설득하는 과정에 시나리오를 수정, 나영의 비중을 늘리기도 했다. 후반작업 때 원래의 시나리오에 따라 편집, 나영의 분량은 현격하게 줄었지만 김혜수는 박중훈과 함께 1987년 제2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연기상을 수상했다.

“야간 촬영이 많았어요. 그런데 밤 10시만 되면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 했고, 잠이 들면 못 일어나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어요. 덩치만 성인이지 완전 애였죠. ‘보름달 하면 떠오르는 연예인 1위’에 뽑힌 데 상처받기도 했으니까.”

 

■ 지상 최대의 작전
<깜보>는 제작진이 1980년대 여느 영화의 두 배에 해당하는 5만 피트의 필름을 사용, 한국영화사상 최다 기록을 세울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깜보가 수감된 이후에 면회 한 번 오지 않은 아내를 찾아 제비와 함께 강원도의 한 목장에 간 장면을 찍을 때에는 눈이 많이 내린 데에다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을 정도로 추웠다.

 

<도둑들>은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10인의 톱스타가 호흡을 맞춘 범아시아적인 프로젝트다. 서울·부산·홍콩·마카오를 오가는 6개월 간의 대규모 로케이션을 통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와 도심 액션을, 이국의 풍광을 담았다. 싱가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대만·브루나이·중국·홍콩·태국 등 8개 국에 선판매되는 쾌거를 이뤘다.

<깜보> 제작 당시 한국영화는 후시녹음 시대였다. 극중 대사는 대부분 촬영한 장면을 놓고 성우들이 더빙을 했다. <울고 넘는 박달재>도 립싱크를 했다. 개봉(1986년 3월 11일) 이후 ‘미스테리적 사건의 포물선 위에 희화적인 패러디를 가미함으로써 오락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흥행성적은 저조했다. 서울극장에서 2주간 상영, 1만6224명(한국영화연감 기준)이 관람하는 데 그쳤다.

 

영화의 완성도와 재미를 떠나 ‘연소자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게 치명적이었다. 당시 공연윤리위원회는 마지막에 깜보와 제비가 기찻길에서 헤어지는 장면을 문제 삼았다. ‘기차가 다녀야 할 기찻길에서 사람이 걸으면 안 된다’며 ‘두 주인공이 헤어지면서 끝나면 안 된다’고 했다. 태평성대에 두 사람의 이별은 ‘퇴폐’라고 했다. 어이없는 청천벽력이었다. 이현세의 인기 만화를 영상화한 <공포의 외인구단>도 ‘공포’라는 단어를 못 쓰게 해 이 영화는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바꿔 개봉됐다.

“<수렁에서 건진 내딸2>도 원래 제목은 <10대의 반란>이었어요. 심의에서 반란이 걸려 ‘반항’으로 고쳤는데 반항도 안 된다고 해 <수렁에서 건진 내딸>과 상관없는 영화인데 <수렁에서 건진 내딸2>가 된 거예요.”

■ 죽음의 공포
김혜수는 <도둑들>의 수중장면을 찍을 때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지난 27년 동안 숱한 영화와 TV드라마를 찍으면서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 감정에 휩싸여 몸서리를 쳤다. ‘왜 우리는 이 일에, 이 찰나에 이렇게 매달리는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관객을 위해서인가, 나 자신을 위해서인가, 영화를 위한 것인가. 영화가 뭐길래 이렇게 이 순간에 모든 걸 걸게 만들까….’

 

김혜수는 시나리오를 읽을 때, 만화처럼 작성된 콘티를 볼 때에도 수갑을 찬 한 손이 자동차에 매인 채 물에 빠지는 장면이 걸림돌이 될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부산 출신으로, 물을 좋아하고, 수영도 곧잘 해 뚝딱 해낼 거라고 여겼다. 4m 깊이의 수조에서 잠수 전문가 등이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곳에 연습을 하러 갈 때에도 가뿐한 마음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물속에서 머리가 어지럽고, 호흡이 가쁘고, 근육이 경직되는 걸 느꼈다. 두 번째 연습할 때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컨디션이 안 좋은 걸로 여겼고, 공기박스 등 추가 안전 장치를 갖췄지만 촬영에 들어갔을 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가까스로 촬영을 마친 뒤 몹시 아팠다. ‘내일 한 컷만 더 찍자’는 최 감독의 문자를 받고 ‘못해요, 진짜로’라고 답했고 뜬 눈으로 밤을 샜다. 이렇게 은퇴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촬영장에는 기다리는 제작진에게 못 하겠다고 말하려고 갔다.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에 안 들어갈 수 없었고, 첫 촬영 후 모니터를 본 뒤 다시 뛰어들어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냈다.

최동훈 감독은 “혜수씨는 두 작품을 같이 했는데 정말 카리스마가 있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며 “수중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짠해지고 정말 감사드린다”고 했다. 박철수 감독은 “<오세암>(1990)은 모두들 주저하는데 김혜수가 키 만큼 쌓인 눈을 먼저 헤치고 간 데 힘입어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고 했다. 두 감독의 말은 가녀린 여배우들이 득세하는 연예계에서 소녀시대에도 여인시절을 곧잘 해내는 등 연기력 논란에 휩싸인 적이 없이 질주해온 김혜수의 오늘과 어제를 읽고 내일을 기대하게 한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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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으로 ‘국민남편’이자 ‘국민아들’로 각광받고 있는 유준상은 상업·독립영화를 아우르는 배우로 손꼽힌다. 대표작으로 <나의 결혼원정기> <리턴> <이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로니를 찾아서> <하하하>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 등이 있다. 김동원 감독의 <알투비:리턴투베이스>와 민병훈 감독의 <터치> 등이 개봉될 예정이고, 강우석 감독의 <전설의 주먹> 촬영을 앞두고 있다.

 

 

■‘꿈의 동반’
유준상(42)은 2001년 프랑스 니스에 간 적이 있다. 당시 누군가가 해변의 불빛을 가리키며 ‘저 곳이 칸’이라고 했다. 유준상은 그 말에 ‘저기를 내가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읊조렸던 칸을 유준상은 2010년부터 3년 연속 다녀왔다.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로 잇따라 꿈을 이뤘다. 올해 장편 ‘경쟁’ 부문에 초청된 <다른 나라에서>로 전세계 매스컴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레드카펫을 밟은 그는 칸 거리에서 남다른 경험도 했다.

 

“프랑스 10대 소녀 세 명이 드라마 제목 <넝쿨당>을 한국말로 말하며  저를 반기더군요. ‘재미있게 보고 있다’면서 ‘케이팝을 좋아하다 드라마도 보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신기하고 감개무량했어요.”

유준상은 이날 평소 꿈도 꾸지 않은 ‘꿈의 동반’이 이뤄진 걸 느꼈다. ‘꿈의 동반’은 유준상이 대원외고 재학생 때 수업시간에, 동국대 연극영화과 1학년 때부터 ‘배우일지’에 쓴 글귀이다. 1999년 6월에 결성된 팬클럽 이름이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쓴 엽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유준상은 대학 1학년 ‘기초연기’ 수업시간에 “배우는 일지를 써야 한다”는 안민수 교수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9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한 권씩 배우일지를 써온 것이다. 최근에는 이 가운데 글과 그림 일부를 발췌 수록한 <행복의 발명>을 출간했다. 인세 수입은 전액 소외된 어린이를 돕는 데 기부한다. <꿈의 동반, 200~2004>는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유준상은 대원외고 재학생 때 이 학교에 온 걸 후회했다. 공부를 잘 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피아노 치는 걸 즐기고, 노래 부르고 축구·야구하는 걸 좋아하는 유준상은 어느 대학 무슨 과를 갈는지 목표가 없었다. 무엇을 하고 싶다는 꿈도 없었다. 어느날 수업시간에 ‘20년 뒤에는 뭔가를 하고 있겠지, 그것이 아트스쿨이면 근사할 것 같다’고 적었다. ‘꿈의 동반’은 이때 쓴 글귀이다.

유준상은 당시 연극영화과에 가거나 배우가 되는 건 꿈도 꾼 적이 없다. 그런 그는 고3 때 꿈을 찾았다. 국민윤리를 가르치던 이만희 극작가(현 동국대 교수)의 “니가 갈 데는 연극영화과”라는 말을 들을 걸 계기로. 연극영화과에 대해 아는 게 없던 그는 졸업한 뒤에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는 데 꽂혀 이때부터 다른 과는 안중에 두지 않았다. 영화감독이 돼 영화를 만들자는 일념에 사로 잡혀 연영과 진학 투쟁을 했다. 그 시절에 대해 유준상은 “반항아였다”며 “머리 기르고, 나팔바지 입고, 멋 내고, 싸움도 많이 하고, 많이 맞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유준상은 졸업 후 재수,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1학년 2학기 때에는 전공을 연기로 바꿨다. 1학기 때 신입생은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워크숍 연극을 한 걸 계기로 배우가 되자고 마음 먹었다. 친구나 가족이 대부분인 40명 남짓 관객이 극중 상황에 따라 웃고 눈물도 훔치는 걸 보면서 연기에 희열과 호기심을 느낀 그는 1995년 SBS 탤런트 5기로 데뷔, 5년여 절치부심의 시간을 가졌다. 드라마의 장르, 배역의 캐릭터 등을 가리지 않고 출연해 경험과 실력을 쌓았다. 1993년 아버지가 작고, 가장이 되면서 집도 없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일을 해야할 상황이기도 했다. 숱한 단역과 <네발 자전거> 등 20여 편의 단막극 주·조연을 거쳐 주말드라마 <태양은 가득히> <여우와 솜사탕> 등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2001·2002년 MBC 방송대상에서 인기상·우수상을 받았고, 뮤지컬 <더 플레이>로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도 수상했다.

■천천히 천천희(喜)
유준상은 탤런트와 뮤지컬 배우로는 각광받았지만 충무로에서는 빛을 보지 못 했다. 장윤현 감독의 <텔미썸딩>(1999)에 ‘수연’(심은하)을 좋아하는 스토커, 안병기 감독의 <가위>(2000)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수재로 출연한 뒤 김정호 감독의 <쇼쇼쇼>(2003)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전국에서 11만5000명(이하 한국영화연감 기준)이 관람하는 데 그치는 아픔을 치렀다.

                    <가위>의 유준상(왼쪽). 최정윤·유지태·정준 등과 함께 했다. <쇼쇼쇼>에서는 이선균·안재환 등과 호흡을 맞췄다.

 

유준상은 영화가 고팠다. 2005년 SBS 방송대상 연기상 수상작 대하드라마 <토지>를 마친 뒤에는 영화를 찾아 나섰다. 드라마 출연 제안은 모두 고사했다. 우선 영화를 하고 드라마는 그 다음에 하겠다는 뜻을 밀어부쳤다. 이 즈음 황병국 감독의 <나의 결혼 원정기>를 알게 된 유준상은 예전과 달리 감독을 두 번 찾아갔다. 여러 배우가 물망에 올라 있어 자신이 캐스팅이 안 될 확률도 높았지만 개의치 않고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한 달여 뒤 택시기사 ‘희철’ 역을 따낸 뒤에는 감독의 고향이자 극중 배경인 경북 예천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희철과 닮은 인물을 만나 나눈 대화를 녹음, 사투리 대사를 익혔다.

촬영이 4개월여 지연되는 동안에는 몸무게를 10㎏ 찌웠다. 안 피던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셨다. 배가 더 나와 보이도록 촬영 전에는 물을 4ℓ정도 마시기도 했다. 마을회관에서 죽마고우 ‘만택’(정재영)과 술을 마시고 횡설수설하는 장면은 실제로 술을 마시고 찍었다. 정재영과 자주 만나 흉금을 털어놓는 시간을 가지면서 진짜 친구가 됐고(촬영을 마친 뒤 유준상의 소개와 중재로 정재영이 분당으로 이사, 이들은 2분 거리에 살고 있음), 극중에 고스란히 반영되는 효과를 얻었다. 흥행성적(76만7657명)은 썩 좋지 않았지만 유준상은 영화배우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리턴>(2007)으로 대종상 남우조연상, <하하하>(2009)로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 <북촌방향>(2011)로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지난 6월에는 CGV무비꼴라쥬 기획전 ‘이달의 배우’로 선정돼 관객과 함께했다. <블루 발렌타인> <킹메이커> 등의 라이언 고슬링에 이어 두 번째 주인공으로. CGV압구정과 CGV대학로에서 2주 동안 상영된 작품은 <다른 나라에서> <북촌방향> <하하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등이다. 이 가운데 <세상에서~ >의 ‘김근덕’은 <넝쿨당>의 ‘방귀남’과 상반된다. 김근덕은 ‘폭력남편’, 방귀남은 ‘국민남편’으로 유준상의 연기 폭과 깊이를 읽게 해준다.

<행복의 발명>에는 유준상의 배우로서의 감성과 지성, 자세와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글이 즐비하다. ‘천천히 천천희(喜)’ ‘세상의 모든 길은 장애물 투성이’ ‘생각은 꿈을 만들고 꿈은 현실을 만든다’…. 탭댄스, 색소폰 연주 등 하고 싶은 건 달려드는 그는 “하나라도 제대로 해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고, 뮤지컬을 할 때에는 “그러니까 디테일이 떨어진다”는 수모를 받기도 했다. 군장대학교 뮤지컬과 교수인 유준상은 “요즘은 배우고 싶은 걸 포기하는 시간이 빨라진다”면서 “변치 않는 꿈은 60살이 넘어서도 뮤지컬 무대에 올라 관객과 교감을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배우로서의 꿈도 영원한 현역이다. 개봉을 앞둔 <알투비:리턴투베이스>에서 편대장 파일럿, <터치>에서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 알코올 중독자로 열연을 펼친 유준상은 <전설의 주먹>에서는 한때 주먹을 꽤 쓴, 지금은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인물로 등장한다. “좌절과 시련은 나를 당당하게 만든다. 20년 전 꿈을 세웠던 ‘지금’이 왔지만 나는 또 다른 20년을 향해 달려갈 것”이라는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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