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만대 감독(42)은 ‘에로영화 거장’ 혹은 ‘작가주의 에로감독’으로 손꼽힌다. <이천년> <연어> <아파바> <딴따라> 등 열다섯 편의 에로 비디오로 각광받은 뒤 극장 개봉작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2003)을 선보였다. 이어 공포영화 <신데렐라>(2006), 케이블TV 드라마 <동상이몽>(2005) <TV방자전>(2011) 등을 만들었다. 12일 ‘에로틱 불량 코미디’라고 명명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를 내놓는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이하 맛섹사)에서 두 남녀는 둘만의 공간에서 서로의 몸을 탐닉한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이하 섹거비)에서 두 남녀는 카메라 앞에서 몸을 섞는다. ‘리허설이니까 살살하자’고 하고, 카메라를 든 감독의 ‘실제로 해보라’는 주문에 응하기도 한다. <맛섹사>의 베드신은 에로티시즘, <섹거비>의 정사신은 포르노그라피에 가깝다.

■“베드신 포인트는 배우와 관객의 정서 공유”
‘내숭떠는 대한민국 선남선녀를 향한 뻔뻔하고 발칙한 알몸 연애담’. <맛섹사>의 헤드카피다. 봉만대 감독은 <맛섹사> 연출 당시 데뷔작이 아니라 열여섯 번째 영화라고 했다. 전작의 연출 경험과 노하우, 자부심을 살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양지로 도약하려고 했다. 그 과정은 지난했다. 2002년 봄부터 준비, 가을에 촬영에 들어갔지만 이듬해 초여름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시작은 좋았다. 제작비 예산이 8억원. 1000~2000만원으로 4박 5일 동안 90분짜리 한 편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됐다. 오디션을 통해 뽑은 배우들도 흡족했다. 노출과 체위에 대한 이해와 공감, 열정과 연기력이 돋보였다. 옷은 잘 벗지만 연기가 안 되는 예전 배우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에로 비디오와 극장용 상업영화는 달랐다. 100m 단거리와 42.195㎞ 마라톤의 차이처럼 그 간극은 현격했다. 비디오는 약속한 기일에 맞추는 게 우선, 현장 여건에 따라 촬영하는 게 자유로웠다. 반면 상업영화는 시나리오대로 완성도를 담보해내야 했다. 예전에는 대여섯 명을 이끌고 혼자 내달리면 됐지만 이번에는 50여명의 출연·제작진과 호흡을 맞춰가는 게 중요했다.

이 와중에 제작사의 투자 유치가 차질을 빚어지면서 촬영이 중단되고 말았다. 제작자가 백방으로 뛰는 동안 봉 감독은 출연·제작진 회의를 계속 가졌다. 하나 둘 불참하면서 나중에는 한 명도 오지 않게 되자 봉 감독은 최악의 경우에도 대비했다. 남은 촬영을 최소화해 영화를 완성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했다. 여관방에서 혼자 골몰하면서 너무나 외로워 메모지에다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말을 끄적이기도 했다.

중단 기간이 3개월을 넘기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촬영감독 등이 <맛섹사> 이후에 하기로 한 작품 때문에 현장을 떠나야 했다. 광고를 하던 시절에 만나 의기투합했던 그들을 위해 봉 감독은 돌아올 때까지 자리를 비워두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위해 봉 감독은 촬영이 재개된 뒤 직접 카메라를 잡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 개봉을 앞두었을 때에는 제목에서 ‘섹스’를 빼야 하는 문제에 시달렸다. 포스터 문구도 ‘유해광고선전물’이라는 이유로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에서 반려됐다. 네티즌 참여 홍보 이벤트를 펼칠 때에는 <맛있는 XY, 그리고 사랑>으로 바꾸는 소동을 빚었다. 시내에 붙인 포스터가 찢기고 지하철역에 붙인 건 시민들 항의로 떼어야 하는 일이 잇따랐다.

 

<맛섹사>는 2003년 6월 27일 개봉, ‘극장 에로영화의 새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전국에서 22만3000명(한국영화연감 기준)이 관람하는 데 그쳤지만 요즘도 수익을 내고 있다. 봉 감독은 개봉한 지 1년이 지난 뒤에 한 포장마차에서 여섯 번을 봤다는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며 요즘도 잘 봤다는 말을 듣는다고 했다.

“말로 하는 사랑보다 몸으로 느끼는 사랑이 더 솔직하죠. 에로영화는 섹스로 눈길을 끌면서 스토리로 공감을 얻어야 해요. 섹스신도 정서를 자아내지 못하면 죽은 장면이에요. 섹스하는 사람의 정서를 보는 사람들이 공유해야 살아있는 장면이 돼요. 에로와 애로의 조화를 꾀하는 게 관건이죠.”


■“남녀가 손잡고 볼 수 있는 에로영화 만들겠다”
봉 감독은 배우 지망생이었다. 열여덟 살 때 진주 개천예술제에서 <방황하는 별들>로 연기상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배우를 포기한 뒤에는 연출부에서 활동했다. <돌아온 손오공> <영웅 후레쉬> <휘파람 부는 여자> <언더 그라운드> 등에서 조감독을 맡았다.

 

감독 데뷔는 1999년 한·일 합작 에로 비디오 <테크니컬 파울>(일본 제목, 도쿄 섹스피아)로 했다. <이천년> <연어> <아파바> <모모> <스파링 파트너> <귀공녀> <딴따라> <터치> <디지털 비디오> 등을 연출, 선풍을 일으켰다. 이름만 보고 선택하게 하는, 영화과 학생들이 찾는 감독으로 주목받으면서 팬카페 ‘애로(愛路) 감독 마니아존’도 만들여졌다.

봉 감독은 여느 감독과 달리 별다른 내용 없이 성애 장면이 이어지는 에로영화를 지양했다. 과감한 노출과 다양한 체위를 보여주는 데 연연하지 않았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감각적 영상을 지향했다. 드라마 구성에 역점을 두면서 베드신은 양보다 질로 승부했다. 다른 위치·앵글에서 네 대의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한 화면으로 구성하는 등 파격을 마다하지 않았다.

<맛섹사> 연출 당시 봉 감독은 배우들과 교감을 나누는 걸 우선했다. 베드신의 경우 직접 남녀 배우를 상대로 시연을 했고, 배우끼리 합을 맞춰 연습하도록 했다. 그런 뒤에도 배우들이 마음과 몸으로 베드신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렸다. 낮 장면은 낮에, 밤 장면은 밤에 찍었다. 극중 인물이 처음 하는 섹스는 촬영 초반에, 익숙해진 다음에 하는 섹스는 후반에 찍었다. 러브신은 몰아서 촬영했다. 배우들이 벗는 데 따른 번거로움, 부담감 등을 덜어주었다.

 


봉 감독은 <섹거비>에서도 이 원칙을 고수했다. <섹거비>는 포르노 유통 1번지였던 1990년대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포르노 테이프 유통이 자주국방·부국강병을 위한 핵개발 비자금 마련의 일환이라는 소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무생이 에로영화 감독, 슈퍼모델 출신 티나와 심재균이 에로배우, 고수희가 유통업자, 이무영이 신분을 감추고 우동집을 하면서 비자금을 모으는 인물, 배한성이 안기부 팀장으로 출연했다. 극중 30%를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스마트폰의 장점을 활용, 실험성을 꾀하면서 사실감을 높였다. 영화진흥위원회 심의에서 예술영화로 인정받았다.

봉 감독은 배우 복이 많다고 했다. 감독으로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건 배우들 덕분이라고 했다.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세월이 흐른 뒤에 에로 이미지에 다시 엮이는 게 싫다면서 이전 영화의 배우들 이름을 사석에서도 거론하지 않는다고 했다.

“저는 ‘주말의 명화’ 세대에요. 에로영화가 아니라 에로명화를 만들고 싶어요. 솔직한 영화가 좋아요. 남자랑 여자랑 손잡고 볼 수 있는 솔직한 에로영화를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서 만드는 거에요. 제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진정한 에로영화를 만들겠다는 제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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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여정(31)은 ‘작품과 연기로 인정받는 배우’를 꿈꿨다. 이 꿈을 데뷔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이룰 수 있었다. 그를 눈여겨 보게 만든 작품은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2010)이었다. 최근 김대승 감독의 <후궁:제왕의 첩>(2012)으로 다시 주목 받고 있는 그의 새 출연작은 KBS 2TV 월화드라마 <해운대 연인들>이다. 조여정은 전직 조폭의 딸 역을 맡아 김강우·정석원·강민경 등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배우는 맛이 제각각인 열매를 맺는 나무다. 조여정은 데뷔 이래 10여 년 동안 자타가 인정하는 찰진 과실 하나를 영글지 못 했다. <방자전>과 <후궁:제왕의 첩>으로 ‘섹시한 나무’가 됐다. 사랑하니까, 살아 남으려고 ‘벗어야’ 했던 두 여인의 판이한 삶을 담은 실과를 빚어냈다. 절치부심의 결과물에 많은 이들이 환호했다. 더러 ‘에로’가 부각되기도 했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조여정은 <방자전> 시나리오를 읽고 쾌재를 불렀다. 춘향과 몽룡·변학도·방자 사이의 4각 관계 드라마가 흥미진진했다. 네 인물은 기존의 그들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주어질 춘향은 예의 정절을 지키는 요조숙녀가 아니라 ‘여자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여인이었다. 춘향이 몽룡과, 그리고 방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읽을 때에는 부끄러웠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도 했다.

 

조여정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마냥 도닥였다. 침착하자고. 그리고 차분한 마음으로 김대우 감독을 만났다. 낮은 목소리로 하고 싶다고 했다. 김 감독이 노출 때문에 싫다는 걸 소속사에서 억지로 데리고 온 줄 알았을 정도로.

생애 첫 베드신이지만 조여정은 노출은 신경 쓰지 않았다. 김 감독의 전작 <음란서생>의 ‘정빈’(김민정) 등을 보고 감독이 여자의 아름다움을, 배우의 자존감을 살리는 걸 생명으로 여긴다는 걸 확신했기 때문에 각 베드신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각각의 감정 연기에 혼신을 다했다. 앵글을 달리 한 두 대의 카메라로 동시에 찍어 베드신은 예상보다 훨씬 수월하게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웃음을 버무려 놓은 <방자전>과 달리 <후궁>은 피눈물이 진득했다. 드라마·캐릭터·노출이 강렬했다. ‘또 사극에 노출’이라는 우려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중요한 고려 요건으로 삼지 않았다. 주변 요소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맡을 인물의 기구한 인생역정, 그 개릭터와 넓이와 깊이를 우선했다. ‘무조건 하겠다, 그래야 한뼘 더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여정은 두 작품·캐릭터의 선택에 대해 위험한 그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자신보다 더 용기 있게 뛰는 배우들이 많다면서 두 감독과의 만남은 행운이라고 했다. 20대에 못 만난, 앞으로도 연이 닿아야 해낼 수 있는, 몇 편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흥행 희소식보다 기다리던 영화의 출연이 확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가 더 기뻤다고 했다.

■20대가 빨리 지나갔으면….
살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싶을 때가 있다. 과거로 되돌아가 새 출발 하고, 미래로 날아가 달라진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조여정은 고 2 때 학생지 모델, 고3 때 <뽀뽀뽀> 제15대 ‘뽀미언니’로 활동했다. 배우 데뷔작은 SBS 청춘시트콤 <나어때>(1998)이다. 송은이·송혜교와 한 하숙집에서 사는 여고생으로 호흡을 맞췄다. 조여정은 공주병 환자, 진짜 공주도 울고 갈 정도의 예쁘고 귀여운 중증 공주병 환자로 나와 주목을 받았다.

                          <뽀뽀뽀> 제15대 ‘뽀미언니’ 조여정(왼쪽)

 

조여정은 수능 보는 날 <나어때> 첫 촬영이 잡혀 시험을 마치자마자 일산 촬영장으로 달려갔다. 동국대 연극과에 합격하고, <나어때> 시청률도 좋아 이후에도 승승장구할 줄 알았다. 그러나 시작이 좋다고 과정이 순탄하고 결과도 좋은 게 아니다. 조여정은 공중파 3사의 <남의 속도 모르고> <마지막 전쟁> <덕이> <소문난 여자> <야인시대> <장희빈> <흥부네 박터졌네> <태양의 남쪽> 등에서 조연을 맡는 데 머물러야 했다. 신인으로서 의당 감내해야 하는 배역이고 통과의례라고 여겼고, 이만한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연기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못내 아쉬웠다. 연기를 하는 게 마냥 신나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관계자·시청자의 눈길을 끌지 못 했다. 도약할 수 있는 작품이 좀체 주어지지 않았다.

 

학교생활도 순탄하지 않았다. 올망졸망에 배역에 매여 수업에 충실할 수 없었다. 학과 실습 작품에서 비중 있는 역을 맡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외 활동이 없는 학우들의 텃세·견제 등에 마음을 다치고는 했다. 전공 수업이 있는 날 소속사에서 시킨 어린이 프로 MC를 보러 가야 할 때면 속이 까맣게 탔다.

 

                                           <나어때>(왼쪽)와 <조선에서 왔소이다>의 조여정

 

조여정은 <애정의 조건>에서 개성 있는 악녀 연기를 펼친 끝에 데뷔 이래 처음으로 MBC 시트콤 <조선에서 왔소이다>(2004)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출장요리사 보조로 일하는 소녀 가장으로, 조선시대에서 서울로 오게 된 두 남자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조여정은 모처럼 신이 났다. 하지만 시청률 저조로 7회 만에 조기 종영되면서 적잖이 낙담했다.

이렇듯 기울인 노력과 상반되는 결과를 맞는 나날이 계속됐다. 새 작품이 거론될 때면 늘 장전 상태에 돌입해 있었지만 불발로 그치는 나날이 잇따랐다. 시간을 유예시켜도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아서 20대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내 길이 아닌가?
‘낙타가 주저앉는 건 짐 위에 얹어진 지푸라기 하나 때문’이라고 한다. 조여정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일에도 상처를 받고는 했다. 20대 후반에는 갈등이 고조됐다. ‘해야 하나, 그만둬야 하나?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데, 일단 기회를 가져야 보여줄 수 있는데, 내 길이 아닌가? 그렇다면 더 상처받기 전에 내가 먼저 끈을 놓을까….’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싫기까지 했다. ‘일복이 없으면 다른 복은? 남편복, 자식복? 그런 복은 있을까?’ 스물 일곱~여덟 살에는 그런 생각이 꽤 들었다.

이런 가운데 공부를 더하고 현장경험을 살려 연기과 교수가 되는 길도 염두에 두고 동국대 영상대학원에 진학했다. 강의를 열심히 들으면서 연극 <프루프> 연습에도 몰두했다. 매일 똑같은 대사를 수없이 반복했다. 자신의 장단점을 살폈다. 쉬는 시간에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이렇게 연습하고 있지만 영화·드라마에 써먹을 기회가 있을까?’ 라는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내가 뭘 할 때 가장 행복했나?’라고 물었다. 대답은 ‘연기’였다. 연기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연기를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연기를 하지 않으면 나는 의미가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해 ‘엄살 그만 부리자, 부족한 게 많고 배울 게 천지다’라며 다시 일어섰다.

조여정은 배우의 좋은 점은 일상의 직간접 경험을 모두 직업(연기)에 접목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안타까운 점은 일단 선택을 받아야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감독·동료·스태프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성과를 낼 수 없는 거라고 했다. ‘감독들이 욕심을 내는 배우, 동료들이 함께 하고 싶은 배우, 관객들이 대화하고 싶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가장 두려운 존재는 관객이라고 했다. 관객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멀고도 어려운 이웃이라고 했다. 에로 이미지가 부각된 데 대해 숲을 안 보고 나무만 보면 그렇게 여길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만큼 그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달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뒷걸음을 치더라도 옆길은 생각하지 않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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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이 변변찮아 처가살이 3년
배우 김응수(52)는 충무로에 뒤늦게, 우연찮게 들어왔다. 영화 데뷔작이 서른여섯 살에 일본에서 찍은  김상진 감독의 <깡패 수업>(1996)이다. 사고를 친 뒤 일본으로 피신한 건달 ‘황성철’(박중훈)과 일류 바텐더의 꿈을 안고 일본에 온 ‘손해구’(박상민)의 이야기를 그린 범죄·액션·코미디다.

 

 

김응수는 해구의 여자친구 ‘삼순’(조은숙)이 일하는 한국인 술집의 웨이터로 출연했다. 촬영을 앞두고 한국인 웨이터 역이 설정됐고, 시간이 없어 스태프 가운데 누군가가 해야 했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 끝에 유학을 오기 전 ‘극단 목화’에서 배우로 이름을 알린 김응수가 맡았다. 당시 김응수는 세계적인 거장으로 손꼽히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1926~2006)의 일본영화학교에서 연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깡패 수업>에는 일본 촬영 진행을 돕기 위해, 현장 경험을 쌓기 위해, 연출부로 참여했다.

촬영은 도쿄에 있는 실제 한국인 클럽에서 했다. 그 술집에 있던 웨이터 의상이 마침 김응수에게 딱 맞았다. 웨이터는 원래 대사가 없었다. 술집 사장인 명계남이 공백을 메꾸느라 ‘너, 손님들에게 외상 주지 마’라고 애드리브를 했고 김응수가 ‘다 쳐마시고 나서 돈이 없다는데 어떡하냐’고 응수하면서 대사가 생겼다. 김응수는 “그렇게 출연한 걸 계기로 귀국 후 계속 배우로 활동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며 “운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깡패수업>의 김응수. 일본 도쿄에 있는 한국인 술집의 웨이터로 출연

                                               했다. 사장(명계남)이 “너, 손님들에게 외상 주지 말라”는 애드리브에

                                               “다 쳐마시고 나서 돈이 없다는데 어떡하냐”고 말하고 있다. 사진/MBC

                                               섹션TV ‘스타 라이징’ 캡쳐.

 

7년 간의 유학생을 마치고 1997년에 귀국한 김응수는 2년여 동안 <투캅스3> <처녀들의 저녁식사> <유령> <주유소 습격사건> <눈물> 등에 출연했다. <투캅스3>에서 ‘수하2’, <처녀들의~ >에서 ‘껍데기집 사내’, <유령>에서 ‘찬석(정우성) 부’, <주유소~ >에서 ‘경찰1’ 등 단역을 맡았다. <투캅스3>와 <주유소~ >는 김상진 감독이 연출했고, <처녀들의~ >와 <유령>은 <깡패 수업>을 만든 우노필름의 차승재 대표(현 동국대 교수·한국영화제작가협회 이사장)가 제작했다. <처녀들의~ >와 <눈물>은 임상수 감독이 연출했다.

김응수는 이렇듯 한 번 인연을 맺은 감독·제작자들이 다시 찾는 배우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출연료가 적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극단 목화 시절에 만난, 잠시 배우를 하다가 그만두고 KBS 1TV의 인기 교양 프로그램 <사랑방중계>에서 보조작가로 활동했던 아내와 어린 딸에게 미안함을 금할 수 없었다. 김응수는 “수입이 변변찮아 처가에서 3년간 살았다”며 “그 후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전셋집을 얻었고 둘째 딸도 그런 다음에 낳았다”고 했다.

                                  영화 <선생 김봉두>(감독 장규성)의 김응수(가운데). 평범한 여학생 ‘남옥’의

                                           아버지로 출연했다. 장 감독은 <깡패수업> 연출부의 조감독이었다.

  

30대 중반을 넘긴 배우가 맡을 만한 비중 있는 배역은 그리 많지 않아 현재는 물론 미래가 불투명하다. 하지만 김응수는 다른 길을 찾지 않았다. 단역 출연이 감독으로 데뷔하기에 앞서 미리 충무로 현장을 경험하기 위한 일환이었지만 배우로 시작한 만큼 연기자로 성공한 뒤에 만들고 싶은 영화를 연출하자고 다짐했다. 3년 동안 <화산고> <신라의 달밤> <패밀리> <취화선> <광복절 특사> <싱글즈> <바람난 가족> <선생 김봉두> <여선생 vs 여제자> <안녕! 유에프오> 등 15편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김응수는 이 과정에 유학 가기 전 극단 시절에는 자신에게 말도 못 붙이던 후배들이 주연 배우로 거드름을 피우는 걸 감내했다. <화산고>의 경우 도입부에 ‘분필을 던지고 맞는 교사’로 나왔지만 엔딩크레디트에 소개되지 않는 난감함도 치렀다. 연극을 다시 하면 당당히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겠지만 이 상태로 돌아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풀을 뜯지 않는 호랑이처럼 당당하게 생활, 충무로에서 지평을 넓혀갔다.

■ “부자의 인연을 끊자”
김응수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어릴 때부터 한학과 고전을 탐독했다. 명문 군산 제일고 시절 부모의 기대와 달리 소설가가 되기 위해 문예창작학과에 가고 싶었다. 서울에서 재수를 하면서 종합예술에 매력을 느껴 연극영화과를 지망했다. 한학자로서 아들이 판검사가 되는 걸 기대했던 아버지는 ‘부자의 인연을 끊자’고 했고, 김응수는 안방을 나온 뒤 동국대 원서를 찢어버리고 말았다. 나중에 형이 서울예대에 원서를 내줘 합격했고, 재학생 때부터 극단 동랑레파토리와 목화에서 활동했다. <운상각> <오구> 등의 주인공으로 각광받았다.

영화에서 비중있는 배역을 맡은 첫 작품은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2004)이다. 김응수는 육사 출신으로 10·26 당시 ‘김 부장’(백윤식)의 수행비서였고, 그의 거사를 ‘주 과장’(한석규)과 함께 주도하는 ‘민 대령’ 역을 맡았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감독 임상수)의 김응수(오른쪽). 그는 육사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장 ‘김 부장’(백윤식)의 수행비서로 ‘주 과장’(한석규)과 함께 거사

                                           를 일으키는 ‘민 대령’으로 출연했다. 실제 인물인 박흥주 대령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고 연구한 뒤 열연을 펼쳤다.

 

김응수는 출연에 앞서 민 대령의 실제 인물인 박흥주 대령 육사 졸업앨범을 구해 보고, 박 대령의 서울고 동창인 유가족 후원회장을 만나는 등 자료조사를 철저히 했다. 박 대령이 책을 많이 읽었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의 오른팔이었지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지 않아 가난한 동생들에게 원망을 들었고, 그 역시 단간 셋방에서 살았다는 사실 등을 연기하는 데 반영해 <그때 그 사람들>을 꽃피웠다.

그럼에도 단역 생활은 계속됐다. <청연> <천군> <강력3반> <투사부일체> <나의 결혼 원정기> <역전의 명수> <한반도> <잔혹한 출근> <가문의 부활-가문의 영광3> 등 2년여 동안 13편에 출연했다. <타짜>에서 중학교도 못 나온, 밑바닥에서 시작해 한 조직을 거느리는 두목이 된 조연 ‘곽철용’으로 주목받았고,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2007) 우정출연을 마지막으로 단역 행진을 10년 만에 마감했다.

김응수는 2006년 KBS 2TV 드라마 <인생이여 고마워요>를 필두로 안방극장에서도 각광받고 있다. <인생이여~ > 출연은 창작극만 올리는 극단 목화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영화는 하고 있지만 TV드라마는 하지 않겠다던 그로서는 일생일대의 선회였다. 드라마에 출연하는 연극계 선배들 표정이 밝지 않아 드라마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고향에 갔을 때, 전화로 안부를 여쭐 때에 ‘너는 언제 테레비에 나오냐’던 어머니가 눈에 밟혀 마음을 바꾼 것이다. 김응수는 “내가 TV드라마에 나오자 어머니가 어찌나 기뻐하시는지 효도가 따로 없었다”며 “진작 할 걸 후회했고 드라마를 계속 하는 건 솔직히 어머니에게 효도하기 위한 점도 있다”고 했다.

                                  드라마 <닥터 진>과 <해를 품은 달>, 영화 <가비>와 <코리아>(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의 김응수.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에 이어 <미스터 고>

                                          를 찍고 있고 <26>에 합류한다. 오는 가을이나 내년 봄에 연출 데뷔작 <미녀

                                          농장> 촬영에 들어갈 계획이다.

  

영화 <가비> <코리아> <돈의 맛>, TV드라마 <해를 품은 달> <각시탈> <닥터 진>. 김응수의 올해 출연작이다. 최근 장규성 감독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촬영을 마쳤고 김용화 감독의 <미스터 고>를 찍고 있으며 조근현 감독의 광주민주화운동 소재 영화 <26년>에 출연한다. 고전과 인문학 서적을 두루 읽고 아침에 일어나면 시를 낭독하면서 발성연습을 한다는 김응수의 연기철학은 ‘정직하자, 거듭 연습하자, 인격을 갖추자’이다. 김응수는 연출 데뷔작으로 준비해온 일곱 여인의 산중생활을 그린 <미녀농장>을 오는 가을이나 내년 봄에 찍을 계획이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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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다수’. 무명배우는 물론 스타들 역시 데뷔 초에는 엔드 크레디트(End Credit)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외(外) 다수(多數)에 속하고는 했다. 예명이 ‘외다수’라고 소개한 이도 없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요듬 드라마 <신사의 품격>으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장동건이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선 작품은 세제 광고였다. 장동건은 여주인공(박순애) 뒤에 서서 “참 잘 빨려요”라고 말하는 인물로 출연했다. 그런데 방송에는 그의 몸 일부와 손만 나왔다.

 

장동건의 첫 드라마 출연작은 MBC 드라마 <아들과 딸>이었다. 장동건은 갓 입사한 동기들과 함께 나무(木)로 출연했다. 주인공(최수종)이 지나가는 길옆에 숨어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다.

 

<신사의 품격>에서 장동건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김수로의 영화 데뷔작은 <투캅스>(1993)다. 강우석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에 김수로는 ‘강 형사’(박중훈)이 출근할 때 인사하는, 경찰서 정문에 서 있는 전경으로 출연했다.

 

 

차인표·김주혁 등이 맡은 첫 배역도 스타덤에 오른 뒤와 비교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로 들린다. 차인표는 첫 출연작이 MBC <집중 퀴즈테크>였다. 진행자가 낸 문제를 재현해 보여주는 영상물에 귀신으로 나왔다. 요즘 드라마 <무신>으로 주목받고 있는 김주혁은 SBS 드라마 <홍길동>에서 포졸을 맡았다. 뇌물로 받은 굴비를 들고 지나가면서 좋아하는 연기를 했다.

 

 

송강호·설경구·황정민·이문식·조재현 등 연극배우 출신 연기파 스타들도 첫 영화에선 단역을 맡았다. 송강호는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 주인공(김의성)의 친구인 작가, 설경구는 장선우 감독의 <꽃잎>(1996)에서 여주인공(이정현)의 오빠, 황정민은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에 주인공(박상민)이 들은 우미관의 웨이터로 출연했다. 

 

이문식은 김용태 감독의 <미지왕>(1996)으로 데뷔했다. 주인공 ‘왕창한’(조상기)이 이용하는 택시의 기사로 출연했다. 이어 배창호 감독의 <러브스토리>(1996)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7)에서 동네 건달, 김성수 감독의 <비트>(1997)에서 동사무소 직원 역을 맡았다.

 

 

하나 같이 보잘것없는 배역으로 <비트>의 경우 재미나는 에피소드를 남겼다. 김성수 감독이 연극을 보러 왔다가 팸플릿에 이문식을 소개하는 글에 <비트>가 적혀 있자 제작진에게 “내가 ‘비트’ 감독인데 어떤 역을 맡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홍보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줄 알고.

 

조재현의 영화 데뷔작은 고영남 감독의 <매춘2>(1989)이다. 그는 조역 호스티스의 동생으로 출연했다. 누나의 죽음에 통곡하는 인물인데 조재현은 눈물이 나오지 않아 곤혹을 치렀다. “어디서 이런 ××를 데려왔느냐”고 자신을 소개해준 친구까지 혼나게 만들었다. 친구는 이 영화의 스크립터였다.

 

사실 카메오나 단역의 경우 편집과정에서 잘리는 경우는 적지 않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차승원, <유령>의 정은표, <베사메무쵸>의 최일화가 겪은 에피소드가 그 일례이다. 

 

차승원은 김상진 감독의 <주유소 습격사건>(1999)에 극중 주유소 부근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폭주족으로 출연했다. 촬영기간은 3일. 그런데 완성된 영화에서 그는 눈만 조금 보인다. 두 눈을 부릅뜨고 보지 않으면, 아니 부릅뜨고 봐도 폭주족이 차승원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편집에서 많은 장면이 잘리는 바람에 그가 <주유소 습격사건>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관계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정은표는 민병천 감독의 <유령>(1999)에 잠수함 내 조리장으로 나왔다. 촬영에 앞서 그는 민 감독으로부터 조리장보다 출연 장면이 더 많은 인물을 제의받았다. 정은표는 그 배역이 적잖이 욕심이 났다. 그런데 그  인물은 '부함장'(최민수)이나 '찬석'(정우성) 등 주인공과 크게 관련이 없는 주변인이었다. 개성있는 인물이지만 편집작업을 할 때 러닝타임에 쫓기다 보면 통째로 빼도 무방해 보였다. 정은표는 민 감독의 제의를 고사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모든 장면이 살았다면 조리장보다 더 눈길을 끌만한 배역이었지만 정은표의 분석대로 그 인물은 편집에서 모두 삭제되고 말았다.

 

최일화는 전윤수 감독의 <베사메무쵸>(2001)에 '철수'(전광렬)의 돈을 떼먹고 도망간 친구로 나왔다. 그는 극중 말미에 철수에게 “미안하다”며 “나중에 네 돈은 꼭 갚도록 하겠다”고 울먹인다. 철수는 그런 그에게 차비를 쥐어준다. 그러나 이 장면은 모두 잘리고 말았다.

 

김대우 감독의 <음란서생>(2006)에서 궁궐을 나온 ‘윤서’(한석규)는 뒷짐을 지고 저잣거리를 걷는다. 가마가 그의 뒤를 따른다.

 

 

한석규는 이 장면을 찍으면서 감회가 새로웠을 듯하다.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1990년 KBS 성우로 데뷔, 91년 MBC 탤런트로 새 출발한 그의 첫 출연작이 베스트셀러극장 <다리>였고 맡은 배역이 가마꾼1이었던 것이다. 

 

동기들과 함께 가마꾼 역을 맡은 한석규는 이 때부터 남달랐다. 자신이 전후좌우 어디에 위치한 가마꾼인지, 어떤 행차인지 등을 묻고 준비를 철저히 한 뒤 연기에 임했다. 춘사 나운규(1902~37)의 첫 배역이 가마꾼이었던 점을 상기, 그처럼 큰 인물이 되겠다면서.

 

그런데 가마 행차 장면은 먼 거리에서 롱 쇼트(long shot)로 촬영, 그의 연기는 빛을 보지 못했다. 가족과 함께 <다리>를 시청한 한석규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야 했다. 그의 모습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이다.

 

배우들은 어떤 배역이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 ‘적은 배역은 없다’는 말을 경구(警句)로 삼고 있다. 유명 배우들은 무명 때부터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철저하게 실천한 이들이다.

 

황병국 감독의 <나의 결혼원정기>(2005)에서 ‘만택’(정재영)은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끝은 창대하였다”고 회상한다. 이 대사는 무명의 설움을 딛고 은막과 안방극장에서 각광받고 있는 배우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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