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기(60)가 7일 열린 제3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 시상식에서 <부러진 화살>로 남우연기상을 받았다. 그의 영평상 남우연기상 수상은 <오염된 자식들>(3회·1983년) <안개마을>(4회) <투캅스>(14회) <영원한 제국>(15회) <축제>(16회) <라디오스타>(26회)에 이어 이번이 일곱 번째다. 영평상 전 부문에 걸쳐 역대 최다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그는 국내에서 남우주연상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이다. 백상예술대상(여덟 번)·영평상(일곱 번)·대종상(다섯 번)·청룡영화상(두 번)을 비롯해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두 번, 이천춘사대상영화제에서 한 번 등 모두 스물다섯 번을 받았다.


 

 

■ “배우는 무슨…. 다시 배우하자”
안성기는 이름과 직업 앞에 ‘국민’이란 칭호를 받은 최초의 주인공이다. 1995년 영화전문지 씨네21에서 ‘국민배우’로 칭한 이후 만인의 공감을 얻고 있다.

 

안성기는 두 번의 데뷔를 했다. 1957년 다섯 살 때 <황혼열차>(감독 김기영)로 데뷔했고, 1965년 <얄개전>(감독 정승문)을 마지막으로 충무로를 떠난 뒤 1977년 <병사와 아가씨들>(감독 김기)로 다시 데뷔했다.

 

1976년 ROTC 출신 장교로 제대한 안성기의 꿈은 배우가 아니었다. 충무로 컴백은 안중에 없었다. 전공(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을 살려 대기업 문을 두드렸는데 번번이 분루를 삼켜야 했다. 종전(終戰) 이후 베트남과 국교가 단절돼있어 베트남어 전공자를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이다.

 

안성기는 부득불 진로를 변경했다. 군대에서 적금을 부어 모은 돈으로 중앙대 대학원 연극영화과에 입학, 영화이론을 공부했다. 그런데 학부에서 영화를 전공한 동기들을 따라가는 게 벅찼다. 결국 한 학기만에 그만두고 진로를 수정했다. 놀았던 물에서 다시 놀자고, 다시 배우가 되자고 마음먹었다.

영화연구가 정종화씨에 따르면 아역 출연작은 70여 편이다. 1959년 제4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10대의 반항>(감독 김기영)으로 소년특별연기상을 받는 등 ‘아역스타’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성인 안성기를 찾는 영화는 없었다. ‘아역배우는 성인배우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충무로의 통설에 시달렸다. 성공을 하려면 출연부터 해야 하는데 아역스타로서의 명성은 과거사에 불과했다.

 

백수로 지내던 그는 철칙을 세우고 이에 따라 생활했다. 아침에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 새로 구입한 자전거를 탔다. 몸매를 만들기 위해 보디빌딩을 했고, 스파르타식 강의로 유명한 한 영어학원에도 다녔다. 1주일에 두세 번은 프랑스문화원을 찾아 영화의 세계를 만끽했다. 밤에는 두문불출한 채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다. <누마>(누나와 엄마의 이미지를 혼합한 말), <흑점> 등 세 편을 완성했다.

 

■ “배우의 길도 내 몫이 아닌가….”
<병사와 아가씨들>은 경비초소 군인들과 고속버스 안내양을 주인공으로 한 멜로드라마다. 안성기는 성격이 밝은 병사 역을 맡아 이동진·이영옥·김경애·나기수 등과 호흡을 맞췄다.

그런데 이 영화는 빛을 보지 못했다. 한국영화연감에 서울 개봉관 상영기록이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상영시간(러닝타임)은 100분, 관람등급은 ‘연소자가’, 관람 인원은 0명으로 기록돼 있다. 반면 문화공보부 선정 1977년 하반기 우수영화 16편 가운데 하나로 뽑혀(경향신문 1978년 5월 20일) 제작사는 외국영화 수입쿼터를 받았다.

 

12년 만의 복귀작이 극장에 간판도 내걸지 못하는 걸 지켜봐야 하는 참담함이란…. 그런 데에다 불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78년작 <제3공작>(감독 설태호), 1979년작 <야시>(감독 박남수)와 <우요일>(감독 박남수)에서도 그는 빛을 보지 못했다.

 

<제3공작>은 6·25를 다룬 전쟁영화다. 안성기는 특공대 막내로 출연, 황해·이대엽·장혁 등과 함께했다. <야시(夜市)>와 <우요일(雨曜日)>은 한 여성이 치르는 사랑의 행로를 그렸다. 안성기는 장미희·김추련·윤일봉이 주연을 맡은 <야시>에 비운의 아이스하키 선수로, 정윤희·윤일봉·전양자 주연 <우요일>에는 중년 남자와 사귀는 연인에게 결별을 선언하는 수영 선수로 출연했다. <야시>는 1979년 2월 23일 단성사에서 개봉, 10만1083명이 관람했다. 1979년 4월 19일부터 대전 신도극장에서 상영된 <제3공작>은 2100명이 관람하는데 그쳤다. <우요일>은 1980년 4월 17일 단성사에서 개봉돼 2만4497명이 관람했다.

안성기는 연기만큼은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봐주지 않는다는 데 절망했다.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배우의 길도 자신의 몫이 아닌가보다라는 생각이 들 때면 눈앞이 캄캄했다. 어린시절에 받은 뜨거웠던 박수갈채는 커녕 배우로 인정해주는 눈길과 손길이 그리웠다. 부글부글 끓다 못해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다독이며 촬영장을 쫓아다녔다.

 

■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하냐?”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 안성기는 배우의 문을 다시 두드린 지 4년 만에 배창호 감독을 만나면서 재기의 기회를 잡았다. 이 과정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

 

배창호 감독은 아역 안성기의 팬이었다. <바람불어 좋은 날>(감독 이장호)에서 조감독을 맡은 그는 중국집 배달부 ‘덕배’ 역에 안성기를 추천했다. 덕배는 약간 사팔뜨기인 한 배우가 맡았는데 이 감독은 그의 연기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감독은 새 인물을 찾았고, 유명 코미디언과 성우가 물망에 올라 있었다. 안성기는 제외됐다. 이 감독은 사시에 말더듬이인 덕배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진 안성기는 이 감독을 쫓아다니며 간청했다. 이 과정에 백수 시절에 쓴 시나리오도 내밀었다. 이 가운데 윤흥인씨 소설 <기억속의 들꽃>과 천승세씨 단편 <눈꽃>을 혼합해 써놓은 작품이 이 감독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덕배 역에 발탁됐다.

그러나 세상을 거머쥔 듯한 기쁨도 잠시 안성기는 고행 길을 걸어야 했다. 여간 깐깐하지 않은 데에다 성격이 괄괄한 이 감독이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하냐”면서 퍼붓는 독설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철가방을 든 채로 스태프 몰래 눈물을 훔치고는 했다. “잘할 때까지 계속해”라는 말에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을 발이 부르트도록 거듭하고는 했다.


 

 

안성기는 자괴감에 잠을 못 이뤘다. ‘배우가 연기를 못한다, 더구나 아역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배우가…. 이렇게 창피할 수가….’ 절로 눈물이 나왔다. 밤마다 촬영한 장면을 복기하고, 촬영할 장면의 수읽기를 했다. 부단한 노력과 주변의 독려에 힘입어 덕배가 됐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고도성장에 따른 사회적 모순을 그렸다. 제19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남자신인상 등을 받은 데 이어 흥행에도 성공했다. 1980년 11월 27일 명보극장에서 개봉, 10만228명이 관람했다. <느미> <미워도 다시 한번 ’80> <평양맨발> 등에 이어 흥행 4위를 차지했다. 남자신인상을 받아 일약 스타덤에 오른 안성기는 1981년 <만다라>(감독 임권택)에서 ‘법운’ 스님으로 열연, 제1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연기상을 차지했다. 이후 30여 년간 관객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국민배우’로 사회봉사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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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으로 ‘국민남편’이자 ‘국민아들’로 각광받고 있는 유준상은 상업·독립영화를 아우르는 배우로 손꼽힌다. 대표작으로 <나의 결혼원정기> <리턴> <이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로니를 찾아서> <하하하>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 등이 있다. 김동원 감독의 <알투비:리턴투베이스>와 민병훈 감독의 <터치> 등이 개봉될 예정이고, 강우석 감독의 <전설의 주먹> 촬영을 앞두고 있다.

 

 

■‘꿈의 동반’
유준상(42)은 2001년 프랑스 니스에 간 적이 있다. 당시 누군가가 해변의 불빛을 가리키며 ‘저 곳이 칸’이라고 했다. 유준상은 그 말에 ‘저기를 내가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읊조렸던 칸을 유준상은 2010년부터 3년 연속 다녀왔다.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 <북촌방향> <다른 나라에서>로 잇따라 꿈을 이뤘다. 올해 장편 ‘경쟁’ 부문에 초청된 <다른 나라에서>로 전세계 매스컴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레드카펫을 밟은 그는 칸 거리에서 남다른 경험도 했다.

 

“프랑스 10대 소녀 세 명이 드라마 제목 <넝쿨당>을 한국말로 말하며  저를 반기더군요. ‘재미있게 보고 있다’면서 ‘케이팝을 좋아하다 드라마도 보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신기하고 감개무량했어요.”

유준상은 이날 평소 꿈도 꾸지 않은 ‘꿈의 동반’이 이뤄진 걸 느꼈다. ‘꿈의 동반’은 유준상이 대원외고 재학생 때 수업시간에, 동국대 연극영화과 1학년 때부터 ‘배우일지’에 쓴 글귀이다. 1999년 6월에 결성된 팬클럽 이름이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쓴 엽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유준상은 대학 1학년 ‘기초연기’ 수업시간에 “배우는 일지를 써야 한다”는 안민수 교수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9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한 권씩 배우일지를 써온 것이다. 최근에는 이 가운데 글과 그림 일부를 발췌 수록한 <행복의 발명>을 출간했다. 인세 수입은 전액 소외된 어린이를 돕는 데 기부한다. <꿈의 동반, 200~2004>는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유준상은 대원외고 재학생 때 이 학교에 온 걸 후회했다. 공부를 잘 하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피아노 치는 걸 즐기고, 노래 부르고 축구·야구하는 걸 좋아하는 유준상은 어느 대학 무슨 과를 갈는지 목표가 없었다. 무엇을 하고 싶다는 꿈도 없었다. 어느날 수업시간에 ‘20년 뒤에는 뭔가를 하고 있겠지, 그것이 아트스쿨이면 근사할 것 같다’고 적었다. ‘꿈의 동반’은 이때 쓴 글귀이다.

유준상은 당시 연극영화과에 가거나 배우가 되는 건 꿈도 꾼 적이 없다. 그런 그는 고3 때 꿈을 찾았다. 국민윤리를 가르치던 이만희 극작가(현 동국대 교수)의 “니가 갈 데는 연극영화과”라는 말을 들을 걸 계기로. 연극영화과에 대해 아는 게 없던 그는 졸업한 뒤에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는 데 꽂혀 이때부터 다른 과는 안중에 두지 않았다. 영화감독이 돼 영화를 만들자는 일념에 사로 잡혀 연영과 진학 투쟁을 했다. 그 시절에 대해 유준상은 “반항아였다”며 “머리 기르고, 나팔바지 입고, 멋 내고, 싸움도 많이 하고, 많이 맞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유준상은 졸업 후 재수,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1학년 2학기 때에는 전공을 연기로 바꿨다. 1학기 때 신입생은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워크숍 연극을 한 걸 계기로 배우가 되자고 마음 먹었다. 친구나 가족이 대부분인 40명 남짓 관객이 극중 상황에 따라 웃고 눈물도 훔치는 걸 보면서 연기에 희열과 호기심을 느낀 그는 1995년 SBS 탤런트 5기로 데뷔, 5년여 절치부심의 시간을 가졌다. 드라마의 장르, 배역의 캐릭터 등을 가리지 않고 출연해 경험과 실력을 쌓았다. 1993년 아버지가 작고, 가장이 되면서 집도 없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일을 해야할 상황이기도 했다. 숱한 단역과 <네발 자전거> 등 20여 편의 단막극 주·조연을 거쳐 주말드라마 <태양은 가득히> <여우와 솜사탕> 등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2001·2002년 MBC 방송대상에서 인기상·우수상을 받았고, 뮤지컬 <더 플레이>로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도 수상했다.

■천천히 천천희(喜)
유준상은 탤런트와 뮤지컬 배우로는 각광받았지만 충무로에서는 빛을 보지 못 했다. 장윤현 감독의 <텔미썸딩>(1999)에 ‘수연’(심은하)을 좋아하는 스토커, 안병기 감독의 <가위>(2000)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수재로 출연한 뒤 김정호 감독의 <쇼쇼쇼>(2003)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전국에서 11만5000명(이하 한국영화연감 기준)이 관람하는 데 그치는 아픔을 치렀다.

                    <가위>의 유준상(왼쪽). 최정윤·유지태·정준 등과 함께 했다. <쇼쇼쇼>에서는 이선균·안재환 등과 호흡을 맞췄다.

 

유준상은 영화가 고팠다. 2005년 SBS 방송대상 연기상 수상작 대하드라마 <토지>를 마친 뒤에는 영화를 찾아 나섰다. 드라마 출연 제안은 모두 고사했다. 우선 영화를 하고 드라마는 그 다음에 하겠다는 뜻을 밀어부쳤다. 이 즈음 황병국 감독의 <나의 결혼 원정기>를 알게 된 유준상은 예전과 달리 감독을 두 번 찾아갔다. 여러 배우가 물망에 올라 있어 자신이 캐스팅이 안 될 확률도 높았지만 개의치 않고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한 달여 뒤 택시기사 ‘희철’ 역을 따낸 뒤에는 감독의 고향이자 극중 배경인 경북 예천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희철과 닮은 인물을 만나 나눈 대화를 녹음, 사투리 대사를 익혔다.

촬영이 4개월여 지연되는 동안에는 몸무게를 10㎏ 찌웠다. 안 피던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셨다. 배가 더 나와 보이도록 촬영 전에는 물을 4ℓ정도 마시기도 했다. 마을회관에서 죽마고우 ‘만택’(정재영)과 술을 마시고 횡설수설하는 장면은 실제로 술을 마시고 찍었다. 정재영과 자주 만나 흉금을 털어놓는 시간을 가지면서 진짜 친구가 됐고(촬영을 마친 뒤 유준상의 소개와 중재로 정재영이 분당으로 이사, 이들은 2분 거리에 살고 있음), 극중에 고스란히 반영되는 효과를 얻었다. 흥행성적(76만7657명)은 썩 좋지 않았지만 유준상은 영화배우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리턴>(2007)으로 대종상 남우조연상, <하하하>(2009)로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 <북촌방향>(2011)로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지난 6월에는 CGV무비꼴라쥬 기획전 ‘이달의 배우’로 선정돼 관객과 함께했다. <블루 발렌타인> <킹메이커> 등의 라이언 고슬링에 이어 두 번째 주인공으로. CGV압구정과 CGV대학로에서 2주 동안 상영된 작품은 <다른 나라에서> <북촌방향> <하하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등이다. 이 가운데 <세상에서~ >의 ‘김근덕’은 <넝쿨당>의 ‘방귀남’과 상반된다. 김근덕은 ‘폭력남편’, 방귀남은 ‘국민남편’으로 유준상의 연기 폭과 깊이를 읽게 해준다.

<행복의 발명>에는 유준상의 배우로서의 감성과 지성, 자세와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글이 즐비하다. ‘천천히 천천희(喜)’ ‘세상의 모든 길은 장애물 투성이’ ‘생각은 꿈을 만들고 꿈은 현실을 만든다’…. 탭댄스, 색소폰 연주 등 하고 싶은 건 달려드는 그는 “하나라도 제대로 해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고, 뮤지컬을 할 때에는 “그러니까 디테일이 떨어진다”는 수모를 받기도 했다. 군장대학교 뮤지컬과 교수인 유준상은 “요즘은 배우고 싶은 걸 포기하는 시간이 빨라진다”면서 “변치 않는 꿈은 60살이 넘어서도 뮤지컬 무대에 올라 관객과 교감을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배우로서의 꿈도 영원한 현역이다. 개봉을 앞둔 <알투비:리턴투베이스>에서 편대장 파일럿, <터치>에서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 알코올 중독자로 열연을 펼친 유준상은 <전설의 주먹>에서는 한때 주먹을 꽤 쓴, 지금은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인물로 등장한다. “좌절과 시련은 나를 당당하게 만든다. 20년 전 꿈을 세웠던 ‘지금’이 왔지만 나는 또 다른 20년을 향해 달려갈 것”이라는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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