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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1.10 안성기 “잘할 때까지 계속 하라고요?”

안성기(60)가 7일 열린 제3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 시상식에서 <부러진 화살>로 남우연기상을 받았다. 그의 영평상 남우연기상 수상은 <오염된 자식들>(3회·1983년) <안개마을>(4회) <투캅스>(14회) <영원한 제국>(15회) <축제>(16회) <라디오스타>(26회)에 이어 이번이 일곱 번째다. 영평상 전 부문에 걸쳐 역대 최다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그는 국내에서 남우주연상을 가장 많이 받은 배우이다. 백상예술대상(여덟 번)·영평상(일곱 번)·대종상(다섯 번)·청룡영화상(두 번)을 비롯해 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 두 번, 이천춘사대상영화제에서 한 번 등 모두 스물다섯 번을 받았다.


 

 

■ “배우는 무슨…. 다시 배우하자”
안성기는 이름과 직업 앞에 ‘국민’이란 칭호를 받은 최초의 주인공이다. 1995년 영화전문지 씨네21에서 ‘국민배우’로 칭한 이후 만인의 공감을 얻고 있다.

 

안성기는 두 번의 데뷔를 했다. 1957년 다섯 살 때 <황혼열차>(감독 김기영)로 데뷔했고, 1965년 <얄개전>(감독 정승문)을 마지막으로 충무로를 떠난 뒤 1977년 <병사와 아가씨들>(감독 김기)로 다시 데뷔했다.

 

1976년 ROTC 출신 장교로 제대한 안성기의 꿈은 배우가 아니었다. 충무로 컴백은 안중에 없었다. 전공(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과)을 살려 대기업 문을 두드렸는데 번번이 분루를 삼켜야 했다. 종전(終戰) 이후 베트남과 국교가 단절돼있어 베트남어 전공자를 필요로 하지 않은 것이다.

 

안성기는 부득불 진로를 변경했다. 군대에서 적금을 부어 모은 돈으로 중앙대 대학원 연극영화과에 입학, 영화이론을 공부했다. 그런데 학부에서 영화를 전공한 동기들을 따라가는 게 벅찼다. 결국 한 학기만에 그만두고 진로를 수정했다. 놀았던 물에서 다시 놀자고, 다시 배우가 되자고 마음먹었다.

영화연구가 정종화씨에 따르면 아역 출연작은 70여 편이다. 1959년 제4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10대의 반항>(감독 김기영)으로 소년특별연기상을 받는 등 ‘아역스타’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성인 안성기를 찾는 영화는 없었다. ‘아역배우는 성인배우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충무로의 통설에 시달렸다. 성공을 하려면 출연부터 해야 하는데 아역스타로서의 명성은 과거사에 불과했다.

 

백수로 지내던 그는 철칙을 세우고 이에 따라 생활했다. 아침에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 새로 구입한 자전거를 탔다. 몸매를 만들기 위해 보디빌딩을 했고, 스파르타식 강의로 유명한 한 영어학원에도 다녔다. 1주일에 두세 번은 프랑스문화원을 찾아 영화의 세계를 만끽했다. 밤에는 두문불출한 채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다. <누마>(누나와 엄마의 이미지를 혼합한 말), <흑점> 등 세 편을 완성했다.

 

■ “배우의 길도 내 몫이 아닌가….”
<병사와 아가씨들>은 경비초소 군인들과 고속버스 안내양을 주인공으로 한 멜로드라마다. 안성기는 성격이 밝은 병사 역을 맡아 이동진·이영옥·김경애·나기수 등과 호흡을 맞췄다.

그런데 이 영화는 빛을 보지 못했다. 한국영화연감에 서울 개봉관 상영기록이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상영시간(러닝타임)은 100분, 관람등급은 ‘연소자가’, 관람 인원은 0명으로 기록돼 있다. 반면 문화공보부 선정 1977년 하반기 우수영화 16편 가운데 하나로 뽑혀(경향신문 1978년 5월 20일) 제작사는 외국영화 수입쿼터를 받았다.

 

12년 만의 복귀작이 극장에 간판도 내걸지 못하는 걸 지켜봐야 하는 참담함이란…. 그런 데에다 불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78년작 <제3공작>(감독 설태호), 1979년작 <야시>(감독 박남수)와 <우요일>(감독 박남수)에서도 그는 빛을 보지 못했다.

 

<제3공작>은 6·25를 다룬 전쟁영화다. 안성기는 특공대 막내로 출연, 황해·이대엽·장혁 등과 함께했다. <야시(夜市)>와 <우요일(雨曜日)>은 한 여성이 치르는 사랑의 행로를 그렸다. 안성기는 장미희·김추련·윤일봉이 주연을 맡은 <야시>에 비운의 아이스하키 선수로, 정윤희·윤일봉·전양자 주연 <우요일>에는 중년 남자와 사귀는 연인에게 결별을 선언하는 수영 선수로 출연했다. <야시>는 1979년 2월 23일 단성사에서 개봉, 10만1083명이 관람했다. 1979년 4월 19일부터 대전 신도극장에서 상영된 <제3공작>은 2100명이 관람하는데 그쳤다. <우요일>은 1980년 4월 17일 단성사에서 개봉돼 2만4497명이 관람했다.

안성기는 연기만큼은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봐주지 않는다는 데 절망했다.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배우의 길도 자신의 몫이 아닌가보다라는 생각이 들 때면 눈앞이 캄캄했다. 어린시절에 받은 뜨거웠던 박수갈채는 커녕 배우로 인정해주는 눈길과 손길이 그리웠다. 부글부글 끓다 못해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다독이며 촬영장을 쫓아다녔다.

 

■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하냐?”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 안성기는 배우의 문을 다시 두드린 지 4년 만에 배창호 감독을 만나면서 재기의 기회를 잡았다. 이 과정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

 

배창호 감독은 아역 안성기의 팬이었다. <바람불어 좋은 날>(감독 이장호)에서 조감독을 맡은 그는 중국집 배달부 ‘덕배’ 역에 안성기를 추천했다. 덕배는 약간 사팔뜨기인 한 배우가 맡았는데 이 감독은 그의 연기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감독은 새 인물을 찾았고, 유명 코미디언과 성우가 물망에 올라 있었다. 안성기는 제외됐다. 이 감독은 사시에 말더듬이인 덕배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진 안성기는 이 감독을 쫓아다니며 간청했다. 이 과정에 백수 시절에 쓴 시나리오도 내밀었다. 이 가운데 윤흥인씨 소설 <기억속의 들꽃>과 천승세씨 단편 <눈꽃>을 혼합해 써놓은 작품이 이 감독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덕배 역에 발탁됐다.

그러나 세상을 거머쥔 듯한 기쁨도 잠시 안성기는 고행 길을 걸어야 했다. 여간 깐깐하지 않은 데에다 성격이 괄괄한 이 감독이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하냐”면서 퍼붓는 독설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철가방을 든 채로 스태프 몰래 눈물을 훔치고는 했다. “잘할 때까지 계속해”라는 말에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을 발이 부르트도록 거듭하고는 했다.


 

 

안성기는 자괴감에 잠을 못 이뤘다. ‘배우가 연기를 못한다, 더구나 아역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배우가…. 이렇게 창피할 수가….’ 절로 눈물이 나왔다. 밤마다 촬영한 장면을 복기하고, 촬영할 장면의 수읽기를 했다. 부단한 노력과 주변의 독려에 힘입어 덕배가 됐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고도성장에 따른 사회적 모순을 그렸다. 제19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감독상과 남자신인상 등을 받은 데 이어 흥행에도 성공했다. 1980년 11월 27일 명보극장에서 개봉, 10만228명이 관람했다. <느미> <미워도 다시 한번 ’80> <평양맨발> 등에 이어 흥행 4위를 차지했다. 남자신인상을 받아 일약 스타덤에 오른 안성기는 1981년 <만다라>(감독 임권택)에서 ‘법운’ 스님으로 열연, 제1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연기상을 차지했다. 이후 30여 년간 관객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국민배우’로 사회봉사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Posted by 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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